사랑이 요구하는 것

by 김이준

첫 만남은 서울에 위치한 백화점 지하 1층에서였다. 나는 그곳에 입점한 브랜드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고 그는 그곳에 파견 온 보안 회사 직원이었다. 첫 만남은 기억에서 흐릿하다. 당시 나는 매장 오픈 전 다른 매장에서 교육을 받고 있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만 유독 하얀 얼굴의 그를 보며 ‘와, 두부 같은 사람이다.’ 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3주 간의 교육 기간은 정신 없이 흘러갔고 나는 그를 잊은 채 오픈할 매장으로 이동했다. 일주일 정도 매장 사람들과 오픈 준비를 끝내고, 어느새 매장 오픈 당일이 되었다.

기대감을 안고 도착한 매장에는 이전 매장에서 봤던 그 하얀 피부를 가진 보안 회사 직원이 웃으며 나를 반겨줬다.


“어? 다른 매장에 계시지 않았어요?

“아, 계약 기간이 끝나서요. 한 달 간은 여기에 있을 것 같아요.”


예상치 못한 재회였지만 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3주간 봤던 사람을 다시 만나 반가운 마음 이 전부였다. 그와 제대로 대화를 나눈 건 오픈하고 일주일 정도 지났을 시점이었다. 내가 있던 매장은 각 층에 직원 한 명, 보안 직원 한 명이 배치가 되었었는데 매장을 가득 메웠던 인파가 어느 정도 줄어들자 제대로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이준 님은 몇 시간 일하세요?”

“저는 주에 20시간 일해요. 아직 학생이라서요.”


마스크 위로 보이는 쌍꺼풀 없는 큰 눈, 선한 눈빛,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그가 순수해 보였다. 나는 그에게 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출근을 하면 그 사람이 몇 층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같은 층에 배정된 날이면 한 시간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시간이 빨리 갔다.

우리는 한 시간 동안 많은 얘기를 나눴다. 쉬는 날에는 무엇을 하고, 무슨 노래를 좋아하고, 어떤 영화를 보는지. 가끔은 서로에게 영화를 추천해주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중경삼림> 을 추천 해줬고, 그는 나에게 <러브어페어> 를 추천해줬다. 그가 추천해준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와 더 많은 얘기를 하기 위해 매일 밤 사랑 얘기가 담긴 영화를 챙겨봤고, 매장에서 그를 만나면 사랑 얘기가 담긴 영화들을 추천 해줬다.


어느덧 가로수길에서의 한 달이 지나갔고 나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 한다는 사실에 울적해 있었다. 울적한 마음으로 도착한 매장에서 날 반긴 건 다름아닌 그가 두고 간 하트 모양의 페레로 로쉐였다. 일종의 시그널이 담긴 초콜렛을 보자 없던 용기가 생겨났다. 나는 매장 옆 이솝에 가서 그에게 줄 선물을 사고, 가로수길에서 유명한 케이크 가게에 가서 페레로로쉐가 올려진 케이크와 스마일 초를 샀다. 그리고 퇴근 하는 그를 불러 세웠다.

2021년 4월. 그 날은 유독 바람이 선선하고 걷기 좋은 날씨였다. 우리는 가로수길에서 잠원 한강공원까지 걸어갔다. 급하게 산 돗자리에 앉은 나는 그 날 처음 그의 마스크 아래 얼굴을 봤다. 그도 나의 마스크 얼굴 아래 얼굴을 봤다. 왠지 벌거벗겨진 기분이었지만 이내 활짝 웃는 그를 따라 웃었다. 우리는 한 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나누지 못했던 대화들을 나눴다. 그 날의 밤은 길었다.


“저, 근데 이준 님 좋아하는데요...”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는 발그레진 얼굴로 덤덤하게 말을 이어나 갔다. 나를 좋아한다고, 쉬는 날 하던 산책을 이제는 나와 함께 하고 싶다고. 영화를 보고, 노래 를 듣는 혼자 하는 일들을 함께하는 사이가 되고 싶다고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연인이 되었고 함께 산책을 했고, 영화를 봤으며, 노래를 들었다. 행복한 순간들 이었다. 나는 그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랐지만 그런 바람이 무색하게 현재의 우리는 관계에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졌던 한 시간의 시간들은 우리가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선선한 봄날의 한강은 서로가 가진 단점을 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설상가상 스케쥴 근무를 하던 내가 평일 고정 근무로 바뀌고 그와 시간이 맞는 날이 적어지며 우리의 만남의 횟수도 줄어갔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적어졌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와 나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오해들이 쌓여갔다.


그래도 우리는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끝난 관계를 억지로 이어가고 있는 것 뿐 이었다. 더는 우리에게 사랑은 없었다. 관계에 대한 의무만 남아있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사귀기 시작했던 그 날에서 정확히 2년이 지난 시점에 헤어짐을 마주했다.


그와 헤어진 이후의 시간들을 눈물로 보내긴 했지만 그리움과 후회가 담긴 눈물은 아니었다.

2년 간 그와 함께했던, 2년 간 내 삶의 전부였던 그가 떠나고 남겨진 상실의 무게에 짓눌려 흘린 눈물이었다.


그와 헤어진 날, 나는 김금희 작가님의 <나의 사랑, 매기> 라는 책을 꺼내 읽었다. 책의 마지막 작품해설에 쓰여진 문장이 가슴에 박혔다.


‘사랑을 통해 겪어낸 그것들을 다른 누구 다른 무엇에도 미루지 않고 감당하며 우리 삶의 함량을 증가시키는 것, 그것이 사랑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를 사랑했고 그와 함께 2년이라는 시간을 겪어냈다. 한때 전부였던 그가 사라진 후 남겨진 상 실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다른 무엇에도 미루지 않고 온전히 그 무게를 감당하며 내 삶의 함량을 증가시키기로 다짐했다. 그것이 사랑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일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