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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동 김종남 Nov 28. 2022

'나의 인생 멘토'는 누구입니까?

길을 걷는데 순간이나마 한모금 생수가 되었나




초년기자 시절, 대기자 김성우(金聖佑 ; 1934 ~ )가 부러웠다. 1970년대 중반 김성우는 한국일보 파리특파원으로 ‘세계의 문학기행’, ‘세계의 음악기행’등을 쓰며 필명을 날렸었다. 한국 최초의 명예 시인(한국시인협회), 김성우는 “세상 책을 다 읽어보고, 세상을 다 돌아보고, 세상 사람들을 다 만나보고 싶다.”라는 나의 ‘무지개 꿈’을 실현하고 있었다. 물론 어린 시절 나의 무지개 꿈은 송나라 대문호 구양수(歐陽修 ; 1007~1072)의 3대 소원을 베낀 것이다. 


언론인 김성우는 65세 되던 1999년 자전적 에세이 <돌아가는 배>를 썼다. 그 안에 ‘스승과 제자’라는 꼭지에서 그는 ‘중학교 첫날의 수난’을 이야기한다. 선생님에게 억울하게 뺨을 맞은 ‘수난’이다. 욕지도라는 조그만 섬에서 태어나 학비를 못 낼만큼 가난한 데다 유난히 부끄럼을 잘 타고 심약했던 우등생은 “지금 나는 그 선생님을 용서할 수는 있어도 이해할 수는 없다.··· 이때부터 스승에 대한 나의 불신은 시작되었다.·… 내가 존경하는 은사도 없고 나를 귀여워해 준 은사도 없었다.·… 나의 학습은 자습이었다.”라고 고백한다. 김성우에게 그 수난은 오히려 자신을 단련시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그의 학창 시절은 1등 자리만 차지한 기록으로 찬란하다. 

                                      실망 늘어놓은 기행문이 당선돼 


광주토박이인 나의 학창 시절은 평범했다. 수난도 없었고 영광도 없었다. 집안 사정도 중상, 학교 성적도 중상이었다. 다만 고교 2~3년 때 평생 처음, 몰입 공부를 했다. 대입이라는 지상과제가 생긴 때문이었다. 물리와 수학을 특히 잘해 성적이 상위로 뛰어올랐다. ‘수재들만 간다’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들어갔다. 대입 후 목표가 사라지자 열정도 식었다. 이상하게 그렇게 잘하던 수학이 재미없어졌다. 


학창 시절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이나 나를 기억하는 선생님도 없었다. 중2 때인가 담임선생님(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께서 생활 평가란에 ‘좀 게으르다’고 써놓으셨는가 보다. 어머님이 내가 게으름 피울 때마다 여러 번 환기시켜 주셔서 꽤 오랫동안 씁쓸하게 가슴에 남았지만, 사실 맞는 말이다. 좀 게을렀다. 이해하는 과목은 그런대로 했지만 외우는 과목은 힘들었다. 역사, 사회, 특히 영어를 못했다. 중3 후반기 고교입시 몇 달 안 남았을 때는 학과 시간 끝난 후 학교에 따로 남아 한 시간씩 영어 특별과외를 받아야 했다. 


하나 생각나는 일이 있다. 중2 때, 경주 수학여행이다. 전세버스에 타고 출발하기 전 교장 선생님이 숙제를 내셨다. 다녀온 후 기행문을 쓰라는 숙제다. 두툼한 원고지, 이십여 장 쓴 것 같다. 난생처음 장문을 써보았다. ‘안압지는 썩은 물웅덩이 --- 포석정은 마을 사람들 놀이터 --- 석빙고는 허물어진 돌덩어리 ---’ 정비가 안 된 채 방치되어 있었던 1천 년 고도에 대한 실망감이 컸었다. 내 반에는 글 잘 쓰는 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 내 짝꿍은 미문으로 유명한 소설가 정비석을 흉내 내 미사여구의 글을 잘 썼다. 그래서 더욱 내 글이 뽑히리라는 생각은 아예 없었다. 그런데 우리 반에서 뽑힌 두 명의 기행문 가운데 내 기행문이 들어있었다. 다른 하나는 공부도 전교 1등 하던 반장의 기행문이었다. 내 짝꿍은 자기 글이 떨어진 데 대해 이해가 안 간다며 투덜거렸다. 나도 의외였다. 돌이켜보니 이 사건이 내가 평생 글쟁이로 들어서는데 한 실마리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수재가 아닌 ‘둔재 물리학도’는 결국 물리학을 포기했다. 1971년 사회에 나와 기자라는 직업을 갖게 되자 나의 꿈은 단순해졌다. ‘이름난 칼럼니스트가 되자’ 세상 책을 다 읽어보겠다는 꿈보다는 훨씬 현실적이다. 존경하는 인물도 생겨났다. 광주일보(구 전남일보)의 설립자인 남봉 김남중(南鳳 金南中 ; 1917~1987)이다. 남봉은 개인적으로 나의 숙부이시다. 남봉은 만능이셨다. 술이면 술, 사업이면 사업, 운동이면 운동, 노는데 가면 노래와 춤, 정치판에 가면 명연설 등 빠지는 것이 없었다. 글쓰기에서도 한 번 펜을 잡으면 기사, 사설, 칼럼, 수필까지 가릴 것 없이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남봉이 40대 초반일 때 배우 김진규(金振奎;1923~1998)가 광주에 왔었다. 김진규가 술을 잘 마신다고 자랑하자 남봉은 ‘나하고 먹어보자’고 술 시합을 벌였다. “몇 시간 후 6살 아래인 김진규(金振奎)가 ‘형님, 나 살려주쇼’라고 물러앉았다.”고 수필집 <월평선>에서 술회했다. 그러면서도 다음날 새벽이면 ‘술 마시는 저녁, 일하는 아침’이다. 남봉은 언제나 제일 먼저 회사에 나타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일을 도맡았다. 

                                          ‘바삐 살다 간 사람’ 남봉 일대기 


내가 숙부이신 남봉을 본받고 싶은 점은 글쓰기 능력이다. 다른 능력은 아예 따라갈 염두도 낼 수 없었다. 남봉의 속필은 유명하다. 한 장 두 장씩 시간에 쫓기면서 쓰이는 대로 공장에 넘겨지기 일쑤다. 한 번은 금남로 옛 동구청 자리에 신문사가 있을 때다. 사설을 쓰다가 바로 옆 야자수 다방에서 손님이 잇달아 불러내 7번이나 자리를 떴다. 당시 편집부장 이원기(李元基)는 몇 번이나 나가는지 일일이 세었다. 그러면서도 남봉은 마감 시간 맞춰 명사설을 써냈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란 칼럼은 31세 때인 1958년 시작해 22년 동안 썼다. 1960년 7월 참의원에 출마해 유세 중일 때도 썼고, 임해 체육대회를 개최하러 여수 만성리 해수욕장에 갔을 때는 새벽 4시 광주행 버스에 원고를 실어 보냈다. 말년 10여 년은 암에 걸려 병마와 싸우면서도 쓰러질 때까지 투병기를 쓰셨다. 남봉이 돌아가신 후 나는 <바삐 살다 간 사람 -남봉일대기>를 썼다. 남봉이 그동안 썼던 그 많은 글을 읽고 그 속에서 필요한 것만 뽑아내는 게 일이었다. 연대별로 정리하고 다듬어 나열했다. 주변 사람들 몇 명의 얘기를 더 취재하고 덧붙이자 그대로 남봉 일대기가 되었다. 도대체 <대도무문>은 몇 편이나 쓰셨나? 일일이 세어보았다. 모두 2,189편이었다. 200자 원고지 8장을 한 편으로 계산하면 17,512장이 된다. 원고지 1,200장 짜리 책을 만들면 15권이나 되는 분량이다. 


일찍이 남봉께 물은 적이 있다. “대도무문을 쓰시면서 누구를 머릿속에 그리시나요?” 그러자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셨다. ‘글을 쓰면서 그 글을 읽는 독자를 얼마나 의식해야 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대상으로 떠올리며 글을 쓰는지 궁금하기도 했었다. “특별히 어떤 대상을 머릿속으로 그리지는 않는다.”라고 답하신 것 같다. 뒤에 돌이켜보니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이미 독자와 한 몸 한 마음, 일체가 되어 글을 쓰는 경지에 이른 분이셨다. 

                                      “먹물을 서 말쯤 마셔야” 


나의 두 번째 인생 스승은 한국화가 아산 조방원(雅山 趙邦元 ; 1926~2014) 이다. 기자 초반 시절 처음 뵈었다. 이후 40여 년간 자주 찾아뵙고 말씀을 들었다. 남종화의 대가이자 불교와 노장사상, 서예에도 대가의 경지에 이르신 분이었다. 난 그림 못 그리는 제자인 셈이다. 내 나이 40대 때, 선생님은 ‘나이 들면 호가 필요할 것이다’ 사주를 따져 물으시더니, 몇 주 후 ‘현동(玄童)’이란 호를 주셨다. ‘현(玄)’은 먹을 뜻하는 검을 현자였다. ‘남종화의 완성자’라 불리는 선생님의 그림에는 유독 먹그림이 많다. 전지 몇 장 짜리 대작들도 무채색에 검은색 일변도이기 일쑤이다. 


선생님은 ‘검은색이 가장 현란한 색’이라고 말씀하신다. “검은색을 찬찬히 들여다보아라, 그 속에 수백 수천 가지 모든 색이 다 들어있지 않느냐” 묵에 대한 예찬론은 끝이 없다. 선생님은 나의 호에 대해서도 “현은 검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니다. 어리석다는 뜻도 있다. 어리석은 아이의 심정을 잃지 말고 세상을 살아라.”라고.” 말씀하셨다. ‘왜 하필 어리석은 아이일까?’ 한창 팔팔하던 때 이해가 어려웠다. 그 말씀이 가슴에 닿기 시작한 것은 20여 년이나 지난 후다. 나이가 들어서야 세상을 보는 ‘어리석은 아이의 경외감’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 


글도 따지고 보면 전부 먹이다. 글만 쓰는 제자가 느끼는 먹그림은 신비롭다. ‘한 번 붓을 잡고 어떻게 단숨에 물 흐르듯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습니까?’ “먹그림을 제대로 그리려면 먹물을 서 말쯤 마셔야 한다.” 실제로 선생님은 그림을 그리다 붓을 가지런히 하기 위해 자주 입에 물고 또 혀와 이빨로 가르고 빨다 마신 먹물이 몇 말을 넘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제대로 된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잉크를 몇 병이나 마셨는가?’ 반성한다. 


한 때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쭈어본 적이 있다. 서울에서 개인전도 열고 작품 활동도 하시면 더욱 빛이 날 것 같아 제자들과 함께 청을 드려본 것이다. 한마디로 거절하셨다. “지역에 남아 지역을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씀이었다. 당신께서 지역에 남아 화맥을 잇는 사명감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2013년 말 곡성군 죽곡면 연화리에 있는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다. 보청기를 사용하지 않으셔, 귀에 입을 가져다 대고 큰 소리로 말씀드려야 했다. 그런데도 옛 제자와 지인들 에피소드까지 세세히 기억하시며 이야기하신다. 헤어질 때 손을 오래도록 놓지 않으셨다. 크고 두툼하고 따뜻한 손이었다. 그게 마지막 뵘이 되어버렸다. 


                               형편없는 예지능력, 대한민국 통일은 언제나? 


세상일이란 엉뚱하다. 학창 시절 가장 못 했던 영어가 직장생활에서는 제일 유용하게 쓰였다. 1978년 34살, 광주일보 서울지사에서 국회 출입할 때이다. 한국기자협회가 해외연수 나갈 기자를 전국에 공모했다. 선발 영어시험을 치렀다. 3명의 합격자 중 한 명으로 뽑혔다. 1979년 9월부터 3개월 동안 영국 요크셔와 리버풀에 있는 2개의 지방신문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현장실무체험(OJT)을 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12·12도 영국서 들었다. 11월 18일부터 <영국의 오늘>이란 르포 특집을12회 게재했다. 


철의 여인 대처수상이 막 집권한 후이다. 영국에는 놀랄 일이 많았다. 지방방송국이 파업하여 방송이 안 나가고, 빙고 게임장에 붐비는 노인들, 어마어마하게 큰 DIY(do-it-yourself) 상점들, 앞으로 우리나라가 겪게 될 노사문제, 노령화사회 문제가 다 거기 있었다. 미리 그 실상을 알리고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 그러나 이 르포는 너무 앞섰나 보다. 신문 기사는 시류를 타야 한다. 너무 빨라도, 너무 늦어도 안 된다. 독자가 읽어주지 않는다. 


3년 후, 한국언론연구원(한국언론재단 전신)이 기자 해외연수 모집을 했다. 이번에도 3명 중 한 명에 뽑혀 미주리대학교 Journalism School에서 1년간 수학했다. 미주리대학에는 외국에서 휴지기를 갖는 거물 정치인들, 쟁쟁한 언론인들이 많이 머무르고 있었다. 굳이 학점을 따지 않아도 되는 연수였는데 ‘이 기회에 한 번 제대로 공부해보자’ 마음먹고 학점을 신청했다. 능숙하지 못한 영어 실력 때문에 고생하느라 머리털이 많이 빠졌다. 미주리대학은 전남대학교와 자매결연 대학이다. 지역인재들이 더 많이 유학 오길 바라며 미국 유학생들의 애환을 그린 <미주유학, 그 이창>을 취재해 보냈다. 1982년 9월23일부터 광주일보에 12회 연재했다. 다음 해 귀국하여 <미주이민, 그 현장>을 10회 썼다. 


1991년, 편집부국장 때는 통독 1주년을 맞아 독일 정부 초청으로 2주간 독일을 방문했다. 동서독이 통일된 지 막 1년, 국회의사당이 있는 본, 허물어진 분단의 벽, 브란덴부르크, 베를린, 역사의 현장 포츠담,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 등을 돌며 통일의 과정과 통일 후의 갈등이 어떤 식으로 조정되는가를 보고 들었다. <통일후 1년, 독일>을 5회 광주일보에 게재했다. 그때는 아무리 늦어도 십여 년 안에 한반도에서도 통일 기미가 있을 줄 알았다. 통일이 가까운 줄 알았다. 내 글도 바로 도움이 될 줄 알았다. 웬걸, 나의 예지능력은 얼마나 형편없는지? 사반세기가 다된 지금도 대한민국 통일은 감감하다. 아직도 몇 년 후라고 말할 자신도 없다. 


                                  평생 학습이 된 한문 공부 


언론문장은 많은 사람에게 읽히도록 쉽게 쓴 글이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나 취재하고 쉽게 읽히는 글을 쓰기 위해 미래학, 역사, 철학, 예술 등 가리지 않고 많은 책을 읽었다. 특히 역사와 철학은 기자의 바탕이다. 제일 심취한 것은 철학을 대중화하는데 앞장선 도올 김용옥(金容沃 ;1948~ )의 책들이다. 1985년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를 본 후 동서양을 넘나드는 도올의 지식 세계에 빠졌다.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여자란 무엇인가> <절차탁마대기만성> <노자와 21세기>, <맹자 사람의 길> , <중용 인간의 맛> 등등 저서가 100권을 넘어선다. 그중 내가 사서 읽은 책만도 30권이 넘는다. 도올은 철학자, 한의사, 시나리오 작가이자 미술평론, 연극 연출,재즈 음악, 거기에다 신과학운동과 기자 활동까지 했다. 도올의 글은 쉽고 재미있었다. 글을 쓰면서 많이 인용했다. 


“우리 조상들이 2천여 년 동안 이룩한 지적 활동과 문화적 성취의 99%는 한문 문화권에서 이뤄졌다.”는 도올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한문 공부를 해야겠다! 선조들이 남겨준 위대한 문화유산, 보물창고를 열려면 한문을 알아야 한다! 한자 자격시험 공부를 했다. 2급, 1급을 거쳐 사범급까지 합격한 후 금계서당에 다녔다. 소학, 고문진보를 비롯 사서삼경을 돌아가며 배웠다. 한문공부는 나의 평생학습이 되었다. 


도올을 만난 일은 한 번 있다. 내가 광주비엔날레 사무총장으로 있을 때 2003년 1월 17일 비엔날레 이사회에 특별강사로 초청했다. 강연료가 엄청났다. 특별예산을 세워 성사시켰다. 도올은 <동양적 사유의 지평에서 본 현대미술>이란 제목 아래 한비자의 화론에서 백남준까지 거론하며 광주 비엔날레가 나아가야 할 길을 짚어주었다. 도올은 ‘광주의 미래가 한국의 미래’라고 말했다. 2014년 칼럼집 <글이 길인가>를 내면서 ‘도올선생의 글을 많이 인용했다’는 감사의 편지와 함께 책을 1권 보냈다. 도올은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는 좋은 글이다. 후학들에게 훌륭한 가치를 잘 전해 달라.”라고 쓴 답신을 바로 보내왔다. 말미에 도올은 “항상 정이 철철 넘쳐흐르는 광주, 저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광주를 꼭 다시 방문하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마지막 스승 틱낫한 스님 


틱낫한 스님(1926~2022)은 나의 마지막 스승이다. 만나본 적은 없다. 2003년 스님이 한국에 왔을 때 그의 저서 <힘 POWER>을 읽었다. 그 뒤 <화> <기도> <비움> <금강경> <죽음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어디에 있든 자유로워라> 등 십여 권을 읽었다. 생활 수행서였다. 몸과 마음이 병났을 때 수십 번씩 되풀이 읽었다.

“이 말씀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길을 걷고, 사람을 만나는 일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금강경 머리말’에서 틱낫한 스님이 우리에게 묻는 말이다. ‘부처님 말씀도 내 생활과 관련을 맺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선언이다. 글을 쓸 때마다 맘속에 새긴다. 내 글은 밥 먹고, 길 걷는 데 순간이나마 한 모금 생수, 한 줌의 산소가 되었나?       2015.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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