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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동 김종남 Dec 07. 2022

왜 걷는가 올레길을?

구멍 숭숭 뚫린 돌담은 대지위에 새겨진 '삶의 디자인'

           “왜 푸른 산속에 사느냐고 나에게 묻네 (問余何事棲碧山) 

           웃으며 답하지 않지만 마음은 저절로 한가롭네 (笑而不答心自閑)---"

                                             <산중문답(山中問答) / 이태백 >




            

올레길을 걸을 때, ‘왜 올레를 걷는가?’ 누가 묻는다면 무어라 답할 수 있나. 올레길을 걷다 보면 많은 사람을 만난다. 처음 만나는 데도 말문이 쉽게 트인다. 두 사람도 비켜 가기 힘든 오솔길이 많기 때문일까. 대화가 쉽게 이뤄진다. 해녀박물관에서 종달바당까지 이어지는 21코스 길에서 만난 여성은 30대 후반이나 될까, 동행도 없이 혼자였다. 씩씩했다. 키도 크고 자세가 똑발랐다. 등에 진 배낭은 상당히 무겁게 보이는데--.  


 “어디서부터 걸으십니까?”  먼저 말문을 텄다. 어제 제주에서 시작해 18, 19코스, 오늘은 20, 21코스를 걷는 중이란다. 하루에 2개 코스씩 30km가 넘는 강행군이다. 3박 4일, 게스트하우스에서 자고 새벽부터 길을 나서 내일은 우도, 글피 오후엔 서울로 떠나는 일정이다. 이십여 분 같이 걷다가 그는 우리 일행을 앞질러 갔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왜 걷는가?’ 묻지 못했다. 


사실 호기심이 생길만하다. 젊은 여성이 혼자서 며칠씩 산길 바닷길을 걷는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그러나 올레길에선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홀로 걷는 사람들이 많다. 젊은이들, 그중에서도 여성이 더 많은듯하다. 그에게 묻고 싶었던 ‘왜 걷는가?’라는 물음은 사실은 나의 ‘화두’였다. 하루에 한 코스씩, 일주일 동안 올레길을 걸으면서 ‘이뭣고’처럼 내세운 화두(話頭)였다. 물론 ‘도를 깨치기 위한 불가의 공안’은 아니다. 그냥 걸으며 잡념을 줄이기 위한 장치였다. 


지난해 2주일, 올해 1주일, 모두 20개 코스의 올레길을 걷는 동안 내내 배낭처럼 잊지 않고 챙긴 화두였다. 덕분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길 따라 수를 놓은 듯 돌담 선들이 정겹게 다가왔다. 무밭, 감자밭, 당근밭, 밀감밭들이 까만 돌담 선 안에서 더욱 진한 녹색으로 돋보인다. 누군가 말했었다. 제주 돌담은 ‘생존의 디자인’이라고. 몇 대에 걸친 농부들의 삶이 새겨진 작품, 억센 제주 바람과 소통하는 숭숭 뚫린 자연스러움이 손에 만져진다. 대지 위에 새긴 삶의 디자인이다. 


오름을 오르내리는 즐거움도 새로워졌다. 조물주께서 크나큰 바가지를 그대로 엎어 놓은 것 같은 오름들은 대개 해발 2백m가량 높이지만 만만치 않다. 중간에 멈출 곳 하나 없이 쭈욱 올라가는 오르막이 숨차다. 21코스 마침표는 ‘제주도 땅끝’이라는 지미(地尾)오름이다. 올라가는 흙 계단 앞에 표지판이 하나 서 있다. “높이 166m, 20분이면 오를 수 있다”. 오른쪽으로 뻗쳐있는 평탄하게 돌아가는 길을 버리고 오름길로 들어선다. 발밑만 쳐다보며 한 발 한 발 올라간다. 땀이 난다. 말대로 20분 못 미쳐 하늘이 확 트인다. 한 걸음 한 걸음 쌓아 올린 숨기운이 봇물 터지듯 탁 터진다. 


내려갈 땐 여유롭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그 꽃 / 고은>”을 입속에서 새겨볼 여유가 생긴다. 강아지풀, 억새, 갈대, 구절초, 들국화, 지천으로 꽃을 피운 ‘배초향’이 동반자다. 올레길 마지막 코스, 21코스를 끝내고 1코스로 들어선다. 1코스 시작점은 말머리를 닮았다는 말미오름(146m)이다. 완만한 능선을 30여 분 오르자 남쪽 바다가 한없이 펼쳐진다. 멀리 바다 한가운데 성산일출봉(180m)이 성곽처럼 우뚝 솟아있다. 


오름은 ‘왜 걷는가’라는 화두를 땀 흘리며 되새기게 하는 시련이다.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을 거치는 3코스엔 통 오름, 독자봉(159m)이 쇠소깍에서 시작하는 6코스엔 제지기오름(95m)이 기다린다. 일주일이나 일상을 떠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건 크나큰 복이다. 21코스에서 배낭 멘 30대가 올레길을 왜 걷느냐고 갑자기 물었다면 난 무어라고 답했을까. ‘소이부답(笑而不答)’할 수 있었을까.    2015.11.30.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길처럼 : 길내는 여자 서명숙의 올레 스피릿> 106~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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