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뉴스를 보면 주인공의 일기가 증거로 채택 경우가 종종 있었다.
실제로 법적 효력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록해 본다.
어젯밤을 잊지 않기 위해.
칼퇴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저녁을 해 먹었다.
그리곤 곧바로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쓰레기를 정리하고 샤워를 하고...
모든 집안일이 다 끝나가는 시점 약 9시.
나는 쓰레기를 버리고 와서 빨래를 널면 오늘의 할 일은 다 끝나는 것이었다.
그 후, 침대에 앉아 책이나 읽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행복한 시간을 가지려고 했었다.
문제는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자마자 생겼다.
우리 집 앞은 왜인지 모르게 쓰레기를 집 앞에 버릴 수 없다.
쓰레기차가 집 앞까지 안 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나는 항상 (관리인의 지침대로) 대로변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이 내용은 건물 1층에도 안내되어 있다.)
이 집에 이사 온 지도 1년이 넘었으니 매번 그랬다.
날씨가 추워져 츄리닝 차림에 후리스를 하나 걸치고 맨발에 쪼리로 쓰레기를 들고나갔다.
어차피 갔다 오면 1분도 안 걸리니까.
강박인지 애착인지 모르겠지만 휴대폰은 챙겨 나갔다.
그렇게 쓰레기를 대로변에 버리고 집에 가려고 뒤를 돈 순간,
등 뒤에서 큰 소리가 났다.
"당신 뭔데 쓰레기를 남의 집 앞에 버려?"
"저요? 저는 관리인이 시키는 대로..."
"아니 관리인이고 뭐고 왜 남의 집 앞에 버리냐고!!"
"근데 왜 반말하세요?"
딱 보기에 40대 나이의 남성.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대로변 앞이 본인 집(건물)이란다.
쓰레기를 왜 여기에 버리냐고 나에게 따져 물었는데,
내가 아무리 말을 해도 분노 조절 장애인지 화를 내기 바빴고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게다가 쓰레기를 골목 안으로 집어던지며 내 어깨를 손으로 밀쳤다.
"네가 뭔데 여기에 버리냐고. 너 어디 살아? 어디 건물에 사는데?"
나는 그 남자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을 깨닫고 관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건물 관리인은 이 집을 계약할 때 중개해 준 부동산 중개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스피커 폰으로 통화를 했다.
관리인이 대로변에 쓰레기를 버리라고 했다는 내용을 통화를 통해 확인시켜 줬지만
이 아저씨는 소리를 치며 화를 내기 바빴고, 통화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건물 관리인이 아저씨와 직접 통화를 하겠다며,
본인한테 아저씨 전화번호를 넘겨주거나 그 아저씨에게 본인 번호를 넘겨달라 했다.
그 아저씨는 본인 번호를 주기 싫다며 화를 냈고,
나는 아저씨에게 관리인 번호를 넘겼다.
근데 왜인지 모르게 그 아저씨는 관리인과 통화하지 않았고, 계속 내게 큰 소리로 화를 내기 바빴다.
"쓰레기는 본인 집 앞에 버려야 할 거 아니야. 여기에 버리지 말고, 저기나 저기에 버려야 될 거 아니야!!"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다음부터 그렇게 버린다고요."
그 아저씨는 정말 모르는 걸까?
쓰레기를 내 집 앞에 버리고 싶은 사람은 그 누구보다 나다.
더운 날, 추운 날, 비 오는 날 아우터를 걸치고 대로변까지 나가는 일이 얼마나 귀찮은데.
어쨌든 쓰레기는 우리 집도, 대로변도 아닌 걸어서 2분 정도 떨어진 위치에 버리기로 했다.
그럼 끝난 거 아닌가?
근데 이 아저씨는 도통 화를 멈출 줄 몰랐고, 우리 집을 물었다.
나는 당연히 집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지만, 이 아저씨보다 집에 먼저 들어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골목을 들어가 집에 들어가는 걸 이 아저씨가 확인할 수도 있으니.
"제가 다음부터 저~쪽에 쓰레기 버린다고요."
"그니까 왜 쓰레기를 여기다가 버리고~ 너 어디 살아? 내가 똑같이 거기에 쓰레기 버려줄게. (반복)"
"자꾸 이러시면 저 경찰 부를 거예요."
"불러라!"
그렇게 112를 불렀다.
112를 부르는 사이 그 아저씨는 본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고,
나는 신고를 마친 후 엄마와 통화했다.
엄마를 통화를 할 때도 아저씨가 옆에서 큰 소리를 냈고, 곧이어 누구와 통화를 했다.
난 그때까지만 해도 관리인과 통화하는 줄 알았다.
엄마에겐 경찰관이 오기로 했으니 상황이 마치면 다시 전화를 건다 했다.
그리곤 건물에선 70대 나이로 보이는 할머님이 나에게 다가왔다.
아저씨의 어머니였다.
"무슨 일이에요? 경찰에 신고당했다는 얘기가 듣고 걱정이 돼서.."
"아, 아드님이 저 밀치고 집 주소를 자꾸 물어봐서요."
"내가 언제 밀쳤는데? 그냥 손짓만 했지!!!"
뻔뻔하게 거짓말하네.
내 오른쪽 어깨 몇 번이나 밀쳤으면서.
그 아저씨는 분에 못 이겨 계속 같은 내용을 소리치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신고해서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라. 집 먼저 들어가기가 무서워서요."
그 사이에 지구대 경찰관 분에게 전화가 왔다.
"신고자 분 되시죠?"
"네네, 맞습니다."
"저희가 지금 가고 있는데, 쓰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거 맞나요?"
"네 맞아요."
"아, 네 알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난 신고할 때 쓰레기라는 얘기를 한 적이 없는데...
아까 그 아저씨가 통화한 내용이 살짝 들렸었는데,
(*쓰레기, 무고죄, 신고 같은 단어가 들렸다.)
난 건물 관리인이랑 통화하는 줄 알았는데 그 아저씨도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
그것도 날 무고죄로 신고하려고.
어쨌든 경찰관 두 분이 왔다.
경찰관이 오자마자 공손해진 태도가 역겨웠다.
그리곤 본인이 혼자 얘기를 하다가 내가 '관리인이 여기다 버리라고...'라는 말을 하자마자
발작 버튼이 눌렸는지 아까처럼 화를 내기 시작했다.
결국 경찰관 한 분씩 나와 아저씨가 떨어져 각자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신고자 분 신분증 주세요."
"아 제가 신분증을 안 들고 나와서..."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데 신분증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중에 든 생각이었지만, 내가 휴대폰을 안 들고나갔으면 어땠을까?
아찔했다.
어쨌든 쓰레기는 내가 다른 곳에 앞으로 버리는 것으로 얘기가 됐고,
(*이미 한참 전에 이 얘기는 이미 끝났지만...)
아저씨가 먼저 집에 들어가는 걸 확인해 줄 때까지 경찰관 분들이 함께 있어주셨다.
그리곤 나도 집으로 들어갔다.
엄마에겐 경찰관이 와서 일이 잘 해결됐다고 걱정 말라고 전화를 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자마자 왜인지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건 무서움의 눈물도 안도의 눈물도 아니었다.
빡침의 눈물이었지.
이어서 관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찰관 불러서 해결됐어요. 앞으론 쓰레기를 저~기다 버리라고 하시네요.
저 말고 여기 건물에 사시는 분들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관리인은 앞으로 혹시 그 아저씨가 문제를 일으키면 바로 전화를 달라 했다.
위로 안 되는 전화를 끊자마자 난 더 목놓아 울었다.
내가 본인(아저씨) 보다 어리고 여자라서 어깨를 밀치고 소리를 질렀던 거겠지.
이 사회가 너무 경멸스러웠다.
내가 힘이 셌다면, 덩치가 컸다면, 남자였다면, 마동석이었다면?
여자로 태어난 것이 너무 서러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던 대로변에서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다들 '괜히 이상한 일에 휘말리지 말자'라는 생각이었겠지.
이기적이야.
'만약 내가 핸드폰이 없었다면?'
'집에 아빠가 있어서 나왔다면?'
생각을 하면 할수록 분노의 눈물만 멈추지 않고 흘렀다.
그 아저씨가 그렇게 안 밀쳤다고 따질 거 알았다면
동영상이라도, 녹음이라도 했었어야 했는데.
나 왜 이렇게 멍청했지, 짜증 나.
이 상황이 끝났지만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 아저씨와 괜히 마주치지 않게 건물 앞을 지나가지 않기?
괜히 밤늦게 돌아다니지 않기?
집 앞 나갈 때도 핸드폰 꼭 소지하기?
녹음을 생활화하기?
내가 기껏해야 할 수 있는 게 이 정도라니.
일단 미뤄놨던 헬스장을 등록해야겠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고.
모든 일은 사랑으로 임하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나였는데.
어젯밤에는 그렇게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추위에 몸이 언 건지, 급체를 한 건지
소화제 두 알, 속청, 진통제 한 알을 먹고
전기장판을 꺼내어 몸을 녹이고 겨우 잠에 들었다.
어쨌든 내일의 나는 살아가야, 살아남아야 하니까.
얼마 전에 본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에선 이런 대사가 나왔다.
"대리님이나 빨리 들어가세요. 남자들이 일찍 일찍 집에 가면 여자 혼자 밤길에도 안전하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