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기쁨 Oct 20. 2022

게스트하우스

주부 -01

게스트하우스는 만인의 숙소다. 국적, 나이, 성별을 불문하고 길 위에 서 있는 이라면 누구든 몸을 뉠 수 있는 곳. 행인들의 이야기가 얽히고설켜 서사를 이루는 곳. 아기자기한 방명록에 다채로운 색상으로 추억을 아로새겨놓는 곳. 제각기 감상은 다를 수 있겠지만 여기에 머물렀던 이라면 누구나 설렘과 아련함의 감정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게스트하우스는 새벽 공기에 귓가가 얼어붙곤 했던 유랑생활에 한 줄기 빛 같은 역할을 했다. 게스트하우스를 사랑하게 된 데에는 가격이 저렴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사람 냄새가 난다는 점이 컸다. 호텔이나 펜션 같은 여타 숙소들은 지니지 못한 정겨움. 옆 사람의 코 고는 소리마저 포근하게 느껴지는 다인실 도미토리에서의 하룻밤은 초면인 사람끼리 깔끔하다 못해 칼로 자른 듯 대하곤 하는 현대인의 인간관계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나그네들 간의 거리가 한층 가까워지는 게스트하우스의 특징은 어떤 이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럽게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가 먹고 자고 씻는 모습은 가장 프라이빗한 영역임이 틀림없고, 이걸 처음 보는 사람과 공유한다는 사실은 그저 편안하게 느껴지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규칙으로 정해놓았던 마음의 벽을 허물기만 한다면, 이토록 매력적인 공간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고야는 숙소에서 만났던 이들 덕분에 더욱 기억에 남는 도시다. 여느 때처럼 고된 이동으로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도심과는 깨나 거리가 있는, 한적한 동네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마치고 한숨 돌리려는데, 1층 로비에서 왠지 분위기가 익숙한 남자와 마주쳤다. 한국인은 한국인을 알아보는 법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국인이세요? 라는 말이 오갔고 정신을 차려보니 우린 친구가 되어 있었다. 

▲ 한국인 누나와 백 형, 그리고 스태프 카나에 씨.

한창 여행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아까 체크인을 도와줬던 스태프와 또 다른 한국인 누님까지 가세했다. 한국인 형님은 본인을 백 씨로, 누님은 김 씨로 소개했다. 스태프인 카나에 씨까지 더해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한국식으로 만들기로 했다. 마침 숙소 앞에 한국 식품점이 있었기에, 김치며 어묵이며 구할 수 있었다. 

▲ 단출한 메뉴였지만 한식은 한식이었다.

김치찌개와 계란 후라이로 단출한 메뉴였지만 카나에 씨에게 한국 음식을 맛보여 주자는 것이 목표였기에 별문제는 없었다. 


조리하기에 마땅한 도구가 없어 전골용 인덕션에 찌개를 끓였고, 닳은 팬에 계란이 다 달라붙고 말았으나 다 함께 요리를 만드는 시간 자체가 너무도 즐거웠다. 카나에 씨는 보답으로(?) 자그마한 종이학을 접어 사람들에게 주었다. 


마침 핼러윈이 다가왔으므로, 백 형과 나는 시내 구경을 하기로 했다. 일본의 핼러윈은 생각보다 규모가 크다. 각지의 대도시 번화가는 마치 서울의 이태원을 연상시킨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콘셉트에 맞는 차림으로 거리에 나와 그날의 이벤트를 기다리고, 기대에 실망하지 않도록 마술사, 행위예술가, 코스프레를 한 이들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준다. 나고야 TV 타워를 뒤편에 두고 펼쳐지는 현대식 구조물인 오아시스21은 보라색과 형광색으로 물들며 몽환적인 핼러윈의 분위기를 배가시킨다. 백 형과 난 따로 핼러윈 차림을 준비하진 못했지만, 축제와도 같은 분위기에 빠져들기에는 하등의 문제도 없었다. 할리퀸과 조커 분장을 한 친구들과 사진을 찍기도 하고, 화려한 복장으로 행인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갸루들과 포즈를 취하기도 하면서, 핼러윈은 저물어갔다.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는 행인들은 각자 온 곳도, 갈 곳도 다르다. 먼 옛날 모닥불 앞에 모여 영웅의 서사를 노래하던 음유시인(Bard)들 같이, 환상적인 밤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속세가 펼쳐지고 다시 그 속에 파묻혀 삶의 여정을 이어가는 것이다. 어제의 로비와 오늘의 로비는 구성원이 다르다. 당연하다는 걸 주지함에도, 떠나는 이를 보거나 떠나야 하는 때에는 역시나 가슴의 어느 한쪽이 아련해져 오고 만다. 


그럼에도 우리가 게스트하우스를 사랑하는 이유는, 우연과 필연의 교차로 속에서 만난 각자의 길을 사랑하고, 부스스한 모습을 사랑하고, 술 한잔 위에 달콤히 퍼지는 이야기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게스트하우스에서의 잊지 못할 추억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