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02
‘일본의 산’ 했을 때 바로 떠오르는 산은 단연코 후지산일 것이다. 각종 광고, 기념품, 창작물 등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후지산은 명실상부 일본의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짙은 쪽빛 하늘에 기차 연기처럼 깔린 구름. 장엄한 산마루에 소복이 내려앉은 만년설의 자태. 우키요에의 대가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그림 한 폭이 약연한다.
후지산은 오래전부터 눈에 담고 싶은 장소였다. 나고야를 지나 관동으로 들어서자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일본의 영산을 얼마 안 가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값진 것일수록 도달하는 길이 험난하다고 했던가. 나고야에서 후지산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교통의 요지로 이름난 나고야인 만큼, 도시를 빠져나가자 규모가 다른 대로가 펼쳐졌다. 문제는 저 큰 고속도로를 몇 번이고 횡단해야 한다는 사실인데…….
내가 주로 사용했던 구글맵은 까딱하면 고속도로건 숲속 오솔길이건 보행자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경로를 설정해버렸기 때문에, 이번에도 10차선에 육박하는 가도를 목숨 걸고 건너야만 했다. 큰 가방을 멘 상태라 갓길에 서는 것도 위험했고, 신호등도 없는 도로를 향해 뛰어드는 건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저번처럼 고속도로 옆에 노숙하기 싫으면 해내야만 했다.
수 톤짜리 트럭이 가방에 스치는 걸 느꼈을 때 교통사고를 직감했다. 만보기로 세 번은 잴 거리를 걷고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살려주세요’라고 쓰인 팻말을 꺼냈다. 차들이 느려지는 변곡점에서 핸드폰 플래시를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해가 다 졌고 주위엔 한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었다.
다행히도 빨간 차 한 대가 아슬아슬 갓길에 멈춰 섰다. 이곳저곳 튜닝을 해 화려했던 차의 차주 야마토 씨는 국방색 자켓에 입에 담배를 물고 한 손으로 운전을 하는, 아주 강해 보이는 분이셨다.
그는 저녁나절에 도로 한복판에서 생쇼를 하는 내가 정신 나간 자식이라면서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들을 늘여놓더니, 편의점에서 요깃거리며 피로해소제며 이것저것 사 주셨다.
천 엔짜리 지폐도 “괜찮으니까 받아!”라며 쿨하게 건네주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츤데레’였다.
츤데레 야마토 씨 덕분에 교외까지 나올 수 있었다. 그가 태워주지 않았다면 찬바람 솔솔부는 굴다리 밑에서 노숙을 했을 게 분명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걸으면 S/A(고속도로 휴게소)가 나온다고 지도가 가리켰다. 역시 걷는 이를 위한 길 따윈 없었고, 나는 고속도로가 펼쳐진 커다란 교량 밑의 샛길을 따라 징검다리도 건너고 하며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무지개색 관람 차까지 있는 상당히 큰 휴게소였다. 이 정도 크기면 차들이 서기에도 수월할 터이다. 난 출구 쪽 주유소에 가서 내 몸집의 몇백 배는 커 보이는 트럭들을 향해 뜀을 뛰며 태워달라고 구애(?)했다.
아까보단 몸짓이 잘 보였는지, 금세 한 차량이 주유를 끝내고선 나를 향해 전조등을 쏘았다. 노리히로 씨는 후한 인품이 용모에서부터 드러나 보이는 인심 좋은 아저씨였다. 그는 저녁을 권했고 식사 장소는 다음 휴게소의 카레 집으로 정해졌다. 마침 나왔던 대화 주제가 매운 음식이었기에, 나는 한국인이 매운 음식을 잘 먹는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 맵기의 정도에서 11단계를 골랐고…. (가장 매운 게 13단계였다) 그날 저녁 나는 팔열지옥을 건너는 경험을 했다. 은사가 사주셨기에 남길 수는 없겠고,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먹기에는 비 내리듯 쏟아지는 땀방울이 시야를 가렸다. 허세 부리면 벌 받는구나. 2단계를 즐기며 흥미롭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노리히로 씨로부터 도망쳐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그래도 어쨌든 다 먹긴 했지만 말이다.
2단계 카레처럼 푸근하고 따듯한 그의 도움 덕분에 나고야와 시즈오카의 중간지점, 도요카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도요카와는 도시가 아닌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심야가 가까웠기 때문에 근처 공터에 아무렇게나 얼른 텐트를 피고서는 잠을 청했다. 바람 소리가 워낙에 거세 동이 트기 전에 잠에서 깼다. 사람 하나 안 보이는 신새벽의 시골은 호젓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저 멀리 산기슭에서부터 비춰 오는 빛줄기가 청백색 찬 기운을 머금은 목조 주택에 내려앉아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후지산을 향해 가는 중이라 그런지 큰 산과 강이 연이어 눈앞에 펼쳐졌다. 끝이 없는 것만 같은 논밭을 거슬러 가을바람이 지나가 민머리가 되어버린 동산을 넘었다. 즐겨 듣는 팝송을 크게 틀어놓은 채 전세 낸 모양 보도를 종횡하니 기분이 썩 좋았다. 중간에 적당한 중식당에서 점심을 때우고 석양이 질 즈음까지 시골길을 걸어 나갔다. 앙증맞은 오두막들 사이를 지나가고 있던 와중, 이번엔 따로 히치하이킹을 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앞에 봉고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익숙한 눈매에 익숙한 머리 스타일. 직감적으로 난 차 안의 아저씨가 같은 민족임을 알아차렸다. 같은 국적임을 알아차린 건 아저씨 쪽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마치 이곳이 한국이라도 되는 모양 아저씨는 곧바로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필경 가방에 수놓은 대한민국 국기가 한국인임을 알렸을 터였다.
“너 뭐냐?”
아저씨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하긴. 이상해 보이는 게 당연하다. 사람 구경하기도 힘든 변두리 시골길을 외국인 소년이 단신으로 걸어가는 행색이라니. 나 같아도 이놈 뭔가 싶을 것이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아저씨는 이쪽은 차들이 지나가는 곳이 아니니, 시즈오카 방면으로 향하는 국도 옆 휴게소까지는 태워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아저씨가 놀란 만큼 나도 놀란 건 매한가지였는데, 이렇게 천 리 타향의 외진 시골 마을에서 한국인을 볼 거라곤 나 역시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학자의 면모를 지니신 분이었다. 한국과 일본 이곳저곳에서 교수 생활을 하셨고, 연세를 드시고 나서는 이렇게 자그마한 마을에서 전원생활을 꾸리셨다고 한다. 깔끔히 정돈된 눈썹과 단정한 옷차림이 아저씨의 체통 있는 삶을 짐작게 했다. 지금은 시즈오카현의 감귤 품종을 조사하고, 연구를 진행하는 중이라고 하셨다.
“지금 옆에 쭉 펼쳐진 밀감밭의 품종이 온주 밀감이야. 우리나라 품종과는 차이가 있지만, 겉모습은 매우 유사하지. 역사적으로 한국 감귤과 일본 감귤 간의 생물학적 유사성을 밝혀내려는 중이란다. 우리가 평소 아무 생각 없이 먹는 귤이지만, 이런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니?”
마침 제철을 맞아 파릇파릇 생기를 내뿜는 감귤밭을 지나며 아저씨의 말씀을 들으니 사뭇 느김이 신선했다.
어디에서 이 같은 사유를 해볼 수 있을까. 여행이 뜻깊은 또 하나의 이유는, 평소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들과는 저 멀리 떨어진, 완전히 새롭고도 생경한 사고를 해볼 수 있다는 점에 있지 않나 싶다.
이후 귤을 먹을 때마다 아저씨 생각이 어렴풋이 나곤 한다. 아저씨는 또,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내 꿈에 조언을 더해 주셨다. 그 역시 한평생을 오롯이 어떠한 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살아왔단다. 모두가 다 같이 잘 사는 것, 공평하게 사는 것.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세상이 그가 꿈꾼 이상이라고 했다. 다만 거친 삶을 살아가다 보면, 꿈을 이루는 일은커녕, 하나의 가치를 지키는 일만 해도 벅찬 법이라고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를 수호하는 삶은 숭고하고 빛나는 거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네가 지금 애쓰는 초심을 그대로 가져가렴. 하고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어느 샌가부터 나는 그를 교수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말씀 한마디마다 무게가 실려 있고, 연륜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낯선 땅에서 만난 호걸이라고 칭했다. 호걸은 호걸을 알아보는 법이라고 얘기하자 교수님이 큰 소리로 웃으셨다.
금세 하늘이 감귤 빛깔로 물들어갔다. 휴게소는 하마나코(浜名湖)라는 호수 곁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이 마침 석양이 질 때라, 경치가 아주 예쁠 거라고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호숫가 너머로 일과를 마무리하는 햇님의 광채가 청명한 수면에 반사돼, 아지랑이와도 같은 주홍빛 궤적을 남기고 있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당연한 법이다. 그럼에도 호걸과 얘기 나눌 수 있는 순간이 끝나가면 더할 나위 없이 슬퍼지곤 한다. 아름다웠던 오늘 하루가 져 가는 석양 아래로 이별을 고하는 일이 자못 슬퍼지는 것처럼 말이다.
교수님은 연락처까지 알려주시며 탈 없이 도전을 마무리하라고 토닥여주셨다. 따듯하게 안아 주시는 포옹에서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졌다. 봉고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양손을 흔들었다. 나도 후일 나이가 들었을 때, 교수님처럼 중요한 가치를 수호하는 호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휴게소에서 저녁을 먹고 밖으로 나왔다. 교수님의 조언에 따르면, 이곳은 관서에서 관동으로 넘어가는 도중에 멈추는 차들이 많기에 어렵지 않게 시즈오카를 향하는 차와 만날 수 있을 거라 했다. 마침 나고야로 출장을 온 도쿄의 회사원, 토리야마 씨를 만나 안전하게 목적지를 향할 수 있었다. 토리야마 씨는 내게 도쿄까지 갈 것인지를 물어보았다. 대단한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대로 도쿄까지 간다니. 그토록 꿈에 그리던 도쿄다.
300km 가까이 되는 거리를 단숨에 이동할 수 있다면 여정도 한결 수월해질 터였다. 그러나 후지산을 못 보고 가기엔 너무도 아쉬웠다. 나는 십여 분이나 고민한 뒤, 마침내 말했다. 시즈오카 근방에서 내리겠습니다!!
아득히 어둑한 시간. 후지산이 있는 후지시(市)를 지나는 고속도로 옆 갓길에 섰다. 주위는 깜깜했고 근처에 폭포가 있는지 물이 낙하하는 소리만이 밤하늘을 울렸다. 시내까지는 10km 남짓 돼 보였다. 늦은 시간 또 이동하기엔 피곤하기도 하련만, 이상하게 걸음이 가벼웠다. 후지산에 도착했다는 희열감에 취했기 때문이었으리라. 한적한 공터에 텐트를 치고 잠을 청했다. 이튿날 새벽, 공원 관리자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여느 때처럼 폐를 끼쳐 죄송하다고 말씀드린 뒤, 얼른 짐을 갈무리해 떠났다.
장미꽃밭을 돌아 길가로 돌아 나온 그때, 웅장한 설산이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석상처럼 멈춰 서서 몇 장이고 사진을 찍었다. 마침내 후지산의 절경을 마주하는구나. 게스트하우스에 가방을 던지듯 놓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후지시에선 어디에서나 후지산을 볼 수 있지만, 다른 장애물에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경치를 즐기려면 산변까지 오르는 편이 좋았다. 게스트하우스 주인 말에 의하면 지금은 산행이 금지된 시기라고 한다. 7월에서 9월까지 딱 3달 만이 인가된 기간이라기에 아쉬움이 컸다.
후지노미야 역을 지나 시라이토 폭포가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 바로 옆에 오토도메 폭포도 함께 위치했는데, 두 폭포 모두 경이로운 광경을 연출해냈다. 흰 비단실 (白系の滝) 폭포라는 이름에 걸맞게 시라이토 폭포는 암반 사이로 물줄기가 새어 나와 마치 비단처럼 흘러내렸다. 소리가 멈추는 곳이라는 뜻의 (音止の滝) 오토도메 폭포는 비류(飛流)가 아름다운 무지개를 그리며 떨어지는 장소였다. 배산임수라고 했던가. 뒤편으론 명산이 병풍과도 같이 펼쳐지고, 앞쪽엔 패연하게 쏟아지는 두 폭포가 고고하니, 이곳이 곧 별천지였다.
후지산의 복류수로 술을 빚는 양조장인 타카사고 양조장에서 사케로 목을 축이고 곧장 걸어 전망대가 있는 타누키 공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은 후미진 산길이었는데, 멧돼지와 마주쳐 별안간 겁이 났다. 곰을 주의하라는 경고판이 공포심을 배가시켰다. 그럼에도 경관이 너무도 아름다운 나머지 무서움 따위는 날아가 버리고 깊은 환희만이 가슴에 남았다. 전망대에 도착해 후지산을 온 감각기관으로 영접할 즈음에는 어째서 후지산이 역사 속에서 일본인들에게 숭배되어 왔는지를 새삼 이해할 수 있었다.
날이 다 저문 뒤에나 숙소로 돌아왔다. 가까운 곳에 조그마한 스시집이 생각나 얼른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스시를 주문해 먹고 있었는데, 주인 할아버지께서 따듯하게 덥힌 사케를 공짜로 주시는 것 아닌가! 할아버지 내외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감칠맛 나는 스시와 아츠캉(덥힌 사케)을 흡수하니 온 근육의 긴장이 사라지고,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좋은 경치와 좋은 음식, 좋은 사람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지니 천하의 누구도 안 부러웠다.
내일은 또 어떤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까.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법이지만, 후지산의 정기를 받아 좋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마음속으로 빌며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