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의 한복판에서 나비를 꿈꾸다
난 어렸을 적부터 자주 이사를 다녔다. 유년 시절 8년을 제주도에서 보냈고 서울, 보은, 단양, 부안, 제천 등 졸업하기 전까지 전국의 여러 지역을 전전했다. 키는 작고 몸집도 왜소했기에 자주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다. 도시로 이사를 와서도 요 시골 꼬마는 장난기도 많고, 나서기를 좋아해 남들 눈 밖에 나기 일쑤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에서 여느 때와 같이 괴롭힘을 받고 돌아와, 아버지께 아이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조금 더 희망적인 말을 들려주셔도 좋으련만. 아버지는 네가 기말고사에서 만점을 받으면 아무도 널 깔보지 못할 거라고 말씀하셨다. 차갑고 현실적인 대답이었다. 밑져야 본전이겠거니 마음먹고 서점에서 파는 문제집 더미를 붙잡은 채 씨름한 지 한 달. 드디어 시험 날이 다가왔다. 결과는 전 과목 만점이었다.
당시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성적표를 들고 책상 위로 올라가 점프를 뛰며 ‘예스!’라고 외쳤고, 친구들과 선생님의 시선은 나에게로 꽂혔다. 몇 초나 정적이 흘렀다. 선생님은 책상에 맨발로 올라간 나를 책망하는 일마저 잊으신 것처럼 보였다.
반 아이들이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더니, 제일 먼저 여자애 몇 명이 다가와 네가 그렇게 공부 잘하는 줄 몰랐다며 칭찬했다. 싸움 좀 하는, 소위 말해 잘나가는 애들이 밖에서 축구나 같이 할까? 하며 전에 없던 권유를 한다. 어제만 해도 혼자 등교하던 전학생에 지나지 않았던 내가, 하루 사이에 받는 대접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이곳에서의 권력은 성적이라는 사실을 또렷하게 깨달았다. 이날부로 난 누구한테 이유 없이 무시당하거나 괴롭힘당하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학부모 면담 때 우리 부모님을 환하게 반겼고 A반이라는, 상위권 학생들에게 집중적으로 입시 대비를 시키는 수업을 들으며 처음으로 반장도 해봤다. 나는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공부를 했고, 문제 풀이에서 남보다 좋은 점수를 거두기 위해 안간힘을 쓰곤 했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여느 고등학생이 되었다.
입시 경쟁이 한창이던 2학년 여름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이유는 ‘남보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가 아닌가? ‘남한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남들을’ 밟고 올라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걸 목표로 하는 삶이라니. 내가 왜 존재하는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지 따위의 질문은 제쳐놓은 채 다들 남을 이기기 위해서 쉴 새 없이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자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밀려왔다. 이곳에서 삶의 초점은 ‘나’가 아니라 ‘남’에게 맞춰져 있었다. 머리가 커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점점 넓어지자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해 가을 자퇴를 선언했고 펜을 놓았다.
부모님과 선생님의 만류에 학교를 그만두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여러 의문은 남아있었다. 반 친구들이 야자와 수능 공부에 매진하는 동안 도서관을 다니며 독서에 열을 올렸고 내 삶의 목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곤 했다. 달력이 바뀌고 넉넉한 교복 자락이 몸에 꼭 맞을 즈음, 어느샌가 나에겐 꿈이 생겼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
화려한 전광판 불빛과 말끔한 건물들에 훌륭히 감추어져 있을 뿐,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병들어있다. 80억 인구를 두 번 하고도 절반이나 먹여 살릴 수 있는 식량 생산량에도 불구하고 매년 300만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굶어 죽어간다. 터치 한 번이면 언제 어디서든 연락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고독과 소외감을 질릴 만큼 느낀다.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자. 아이들은 영어 유치원에 진학해 누구보다 빨리 외국어를 접하고, 피아노 학원, 산수 학원 등 양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도 없는 수의 사교육을 받으며 자라나, 결과적으로는 이 자본 경쟁의 승리자 위치에 설 수 있는 인재가 되기를 강요받으며 자란다. OECD 국가 중 전 국민의 자살률이 1위인 데다가, 청소년의 행복 지수는 꼴찌 수준에 머무는 나라. 그런데도 돈을 버는 데에서는 전 세계 10위에 달하는 해괴한 국가 한국은 승리자의 위치에서 끔찍한 불행을 감내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거대하고 복잡해진 사회 구조와 비교하면 개인은 한없이 작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당장 눈앞의 현실을 피해 도망칠 방도도 없을뿐더러, 나 혼자 무언가 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 것 같지도 않다. 주위에선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할 시간 따위가 있으면 차라리 수학 문제 하나 더 푸는 게 이득이라고 말한다. 점점 우리의 가치가 무엇인지 희미해져 가고 무기력감이 엄습해온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사회를 내 아들딸에게 물려주고 싶을까? 대답은 전혀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까지 경쟁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남과 비교하지 않아도 우리라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지, 그리고 얼마든지 행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다.
경쟁의 한복판에서 나비를 꿈꾸다.
그러나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사는 현대인에게 세상을 바꾸느니 마느니 따위의 말은 마치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쌓여 있는 업무와 돈으로부터 비롯된 압박감. 당장 숨 쉴 구멍조차 찾기 힘든 이들에게 위인이나 학자들은 그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일 뿐이다.
피폐해진 일상에서 책 한 권이라도 읽을 여유가 있다면 오히려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과열된 한국 사회에선 자극적이고 화려한 콘텐츠 정도만이 소비자에게 도달한다. 골치 아픈 생각 대신 지금 당장 즐길 수 있는 영상 매체나 오락을 찾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아무리 정성 들여 길게 쓴 논문도 읽는 이가 없다면 의미가 있기 힘든 것처럼,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독자에게 도달하지 못한다면 꿈은 정말 꿈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선 광고 수단이 필요했다.
누가 보더라도 놀라움과 관심을 가질 수 있을 만한 흥미 요소를 갖추기 위해 선택한 일은 도보 여행이었다. 대중교통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나라들을 일주하는 도전은 비단 개인적인 추억과 경험을 위한 일만은 아니었다. 대중을 매혹할 수 있는 에피소드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경쟁에서 승리해야만 한다는 집착에 매몰되지 않고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도합 약 16,766km, 2년 동안의 일본 도보 일주와 유럽 도보 일주는 그런 소망을 간직한 채로 계획됐다.
여정은 진정으로 고되고 힘들었다. 많은 이들이 어째서 사서 고생하는 일을 하는 거냐고 물었다. 혹자는 네가 그렇게 노력해봐야 무엇이 바뀔 수 있겠느냐고 조소했다. 어깨가 무너져 내릴 만큼 무거운 가방을 멘 채 땡볕 아래에서 행군하고, 말 한마디 안 통하는 이역만리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고 있노라면 지금의 내 행색이야말로 영락없는 패배자의 모습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주위에선 다들 취업과 장래를 위해 노력하는데 나는 혼자 뒤처지는 것은 아닌지 수시로 불안해진 적도 많았다. 여행지에서 근사한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관광객들을 볼 때마다 초라해진 기분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내가 다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여행에서 만난 따듯한 사람들 덕분이다. 나 혼자 잘났다고 마지막에 닿을 수 있는 도전이 아니었다. 수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도움과 응원을 해주었고 그들의 기대를 받으면서 포기한다는 것이란 있을 수 없었다.
비록 나의 삶이 실패자나 패배자로 비친다 해도 상관없다. 여정 속에서 만난 사람들과 가까운 이들에게 내 이야기가 닿을 수 있다면, 나의 의지가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난로의 온기가 은은히 방안을 덥히듯 세상에 스며들 것이라고 믿는다. 아울러 선현들이 추구하고 인류에게 남기고자 했던 가치들을 전파하는 데에 일조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으리라.
이름인 기쁨은 너 혼자만 잘살지 말고, 모두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아버지가 지어주셨다. 누군가에겐 흥미로운 여행 이야기로, 누군가에겐 삶에 대한 고민을 불러일으키는 울림으로, 누군가에겐 저런 걸 도대체 왜 하지? 하는 조롱거리로도 좋으니, 내 여정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살며시 다가가 기쁨으로 자리하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