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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기쁨 Oct 20. 2022

럭키맨

간토 -01

울적한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햇무리가 드리우고 침침한 날씨가 이어졌다. 맥주 8캔으로 잃어버린 지갑에 대한 묵념을 마치고 날이 갤 때까지 기다렸다. 이틀 뒤 일본의 수도, 도쿄를 향해 발걸음을 뗐다. 요코하마에서 도쿄까지는 32km 남짓으로, 하루 안에 걷기에는 조금 많으나, 그렇다고 무리하면 못 갈 거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저번 ‘과유불급’ 편에서 얻었던 교훈이 있기에, 억지로 서두르기보다는 중간에 휴식을 취하는 편을 택하기로 했다. 


다리와 육교를 몇개나 넘어, 드디어 도쿄의 제일 남쪽에 위치한 오타구에 들어섰다. 17km 정도 걸었으니 딱 절반이다. 둘러보니 근처에 천연온천이 꽤 많은 것 같았다. 천연온천 누랜드라고 적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동네목욕탕보단 크고 스파 랜드보단 한적한, 주차장이 딸린 건물이었다. 이곳에서 일단 씻고 나온 뒤 밤에 텐트를 칠 장소를 찾든지 하기로 마음먹었다. 


뜨거운 탕 안에서 종일 쌓였던 피로를 덜어내 뽀송뽀송하게 되고 나니 금방 허기가 졌다. 마침 구내식당이 있길래, 가방을 맡겨놓고 음식을 주문했다. 소고기와 채소를 고추기름에 볶아 낸 제육볶음 비슷한 요리가 메인이었다. 고기를 밥 위에 얹어 허겁지겁 먹고 있는데, 저편에서 백발이 성한 스포츠머리의 아저씨가 흥미롭다는 듯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여기서 무얼 하냐는 둥,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둥.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최근에 구한 한국 술이 있다면서 초록색 병을 가져왔다. 으레 소주겠거니 했는데, JINRO 25라고 쓰인 상당히 높은 도수의 증류주였다. 한국에선 일품진로라는 이름을 가진, 희석식이 아닌 증류식 소주인 것 같았다. 


그는 선뜻 얼음까지 담아 한 잔을 권했고, 나는 죽 받아 마시며 여행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아저씨는 누랜드 온천의 주인장이셨다. 아저씨도 한잔하시더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셨는지, 밖에서 술을 더 마시면 어떻겠냐고 물어보셨다. 음식값도 받지 않으셨다. 나는 영광이라고 답했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 조그마한 바로 들어갔다. 


아저씨는 바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를 ‘럭키맨’ 이라고 소개했다. 나를 만난 것 자체가 행운이라는 의미와 내가 사람들에게 행운을 전파한다는 뜻에서 별명으로 삼으신 거다. 바 안에는 온천 주인 미노루 씨의 아들인 료 씨와 그의 부인 코마키 씨, 그리고 바텐더 신이치 씨와 손님 유우토 씨, 마지막으로 세계여행 경험이 있는 회사원 미야우치 씨까지 다섯 명이 이미 술잔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 요코하마의 온천 ‘누랜드’ 앞 바에서 만난 사람들.


우리는 각자의 경험을 안주로 삼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즐거운 밤을 보냈다. 마지막 술값 계산을 두고 타칭 ‘럭키맨’인 내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사다리 타기의 당첨 번호를 정했다. 선택을 받은 행운의 주인공은 유우토 씨. 담배를 피우고 돌아오자마자 모두의 환영을 받았다. 유우토 씨는 “뭐가 럭키라는 거야!!”라며 역정을 냈지만, 쿨하게 인정하고 술값을 계산했다. 괜히 나 때문에 돈을 쓰시는 것 같아 송구스러웠다. ㅠㅠ 

▲ 수억 엔(?)을 뽐내는 료 씨. 그의 인심에 가짜 돈이 진짜 돈처럼 느껴졌다.

가게 밖에는 도시의 달이 빛나고 있었고, 우리는 각자의 행운을 품은 채 한명 두명 보금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를 빼고 말이다. 얼근히 취해 감각이 무뎌진 어깨에 가방을 얹고 갈 곳을 찾으려던 내게 료 씨가 말을 걸었다. 자기 집에서 자고 가도 된단다. 료 씨와 코마키 씨에게 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걱정됐지만, 료 씨는 아무런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면서 흔쾌히 집으로 날 안내했다. 


집에 도착해 짐을 내려놓자 근심이 모두 녹아 없어지는 듯했다. 아까 술자리에서 내가 풀었던 야쿠자 이야기가 적잖이 인상 깊었던지, 료 씨는 자기 사진도 찍어달라면서 가짜 돈다발을 들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책에 진짜 돈이라고 적어주겠다고 했다. 내겐 그의 따듯한 인심이 진짜 돈 몇억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날이 밝자 료 씨는 도쿄로 향하기 좋은 큰길까지 날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근데 이제부터 삿포로에 가까워질수록 급격하게 추워질 게 분명한데, 어떻게 겨울옷은 있냐고 물어보시길래, 어떻게든 되겠죠. 하고 명랑(?)하게 답했다. 실제로 당시 입던 후드티도 누군가 벤치에 두고 간 걸 주워 입었던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곤 안쓰러우셨던지, 료 씨와 코마키 씨는 나를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유니O로의 경량패딩과 발열내의를 사 주셨다. 얼떨결에 새 옷이 생긴 나는 생일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되어 연신 감사를 표했다. 한술 더 떠서, 료 씨는 야쿠자들도 야키니쿠를 사주었는데 우리도 그 정도는 당연히 해주겠다며 백화점에 있는 야키니쿠 집에 들어가 질 좋은 고기를 양껏 시켜주었다. 아무리 인연으로 만나 친구가 됐다지만, 이렇게 하루 저녁 본 생면부지의 외지인에게 이것저것 사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이렇게 도와주시는 분들의 체면을 봐서라도 무슨 일이 있든지 간에 최북단까지 완주해야겠다는 각오가 한층 두터워졌다. 

▲ 료 씨와 코마키 씨가 패딩과 내의를 사주셨다. 야키니쿠까지 대접받다니. 이렇게 감사할 수가!


나는 료 씨와 코마키 씨가 준 옷을 입고 최북단에서 사진을 찍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약속은 지킬 수 있었다) 삶의 여유와 더불어 낯선 이에게 거리낌 없이 베풂의 미덕을 실천하는 둘의 배포와 인덕에 존경심이 솟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정말 ‘럭키맨’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노루 씨는 내가 사람들에게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말했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길 위에서 만나는 경험을 하는 내가 오히려 행운아인 게 아닐까?


행운은 아무 문간에나 서서 기다리지 않는다
(Fortune does not stand waiting at any one's door.)      


라는 네덜란드 속담이 있다. 적극적으로 세상의 문을 열고, 나에게 주어진 행운을 능동적으로 줍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럭키맨’이 되는 방법이 아닐는지. 네 잎 클로버는 드넓은 벌판 어딘가에 있다. 그걸 줍는 건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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