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기쁨 Oct 20. 2022

고생이 많아

간토 -02

도쿄는 많은 이들에게 꿈의 도시다. 저마다의 목적과 야망을 품고 상경하는 젊은이들과 하늘을 뚫을 듯이 서 있는 마천루들. 한 나라의 수도라는 기상과 위품을 지니면서도 한편에서는 더는 맞닿을 길이 없어 보이는 부호와 걸인의 공존이 모순을 자아내는 도시. 일본의 중심 도쿄를 향해 이제 10km도 채 남지 않았다. 갑자기 쏟아진 소낙비와 땀이 범벅 돼 꼴이 말이 아니게 됐지만, 그래도 몇 시간 뒤면 대도시에 어엿이 입성할 거란 기대감에 힘이 났다. 끝이 안 보이는 빌딩 숲의 웅장함에 압도되어 그런 것일까. 여느 다른 장소에 도착했을 때와는 다르게, 도쿄의 심장부 도쿄역이 가까워지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렇게도 고생을 했건만, 어쨌든 꿈에 그리던 도쿄에 도착했구나.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면 두 시간 반도 채 걸리지 않았겠지만, 오직 두 발과 사람들의 도움만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맥없이 항공편으로 왔다면 지금까지의 주옥같은 경험은 얻지 못했을 거다. 주위에 사람이 적어진 틈을 타 “도쿄 도착했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성취감과 안도감에 더불어 피곤 역시 급격히 다가오는 것이었다. 비교적 저렴한 곳에 숙소를 잡고 도쿄에서의 첫 끼, 라멘과 맥주를 흡입하다시피 했다. 




거의 반나절을 정신없이 자고 일어나니 해가 중천이었다. 좋아 나도 관광을 시작해보자! 그렇게 도쿄의 랜드마크 스카이트리와 센소지 안의 카미나리몬, 롯폰기와 긴자를 둘러보았다. 여행 계획표라곤 전혀 없는 내가 시간별로 갈 곳을 정해 열심히 돌아다니니 정말 오랜만에 관광다운 관광을 하는 것 같았다. 스카이트리에서 일몰을 보며 조각 케이크와 스파클링 에이드를 즐기고, 센소지에서는 저번 미야자키에서 해봤던 오미쿠지(운세 뽑기)를 해보았다. 웬일로 나온 운세는 대길(大吉)! 제일 안 좋은 운세였던 말길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운명을 개척해 대길로 나아 온 것 같아 뿌듯했다.

▲ 도쿄의 유명 관광지 센소지.

 

그런 뒤엔 뜻밖의 게스트가 찾아왔다. 아카네는 예전에 히로시마에서 프리허그를 했을 때 만났던 고등학생쯤 돼 보이는 여자애였다. 그때 내 명함을 줬었는데, 연락이 와서 얘기를 주고받다 도쿄에 도착했다고 하니 신칸센을 타고 히로시마에서 도쿄까지 오겠다는 것이었다. 자기는 혼자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본 경험이 없다면서, 이번 기회에 홀로 여행을 해보고 싶은데 내가 가이드를 해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나야 혼자보단 둘이 좋고, 둘보단 셋이 좋은 사람이니 안 될 게 뭐겠는가. 외롭게 관광하는 것보단 동행하는 편이 더 재밌을 테니 도착하면 언질을 주라고 아카네에게 일러두었다. 아무래도 나는 대학교엘 들어가서도 신입생이니 막내였고, 여행지에서도 언제나 나이가 제일 어리곤 했다. 따라서 나보다 어린 친구에게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금 막막했는데, 그래도 다행히 털털한 성격의 아카네는 자기가 먼저 하고 싶은 걸 적극적으로 말해서 이곳저곳 즐겁게 구경할 수 있었다. 


신칸센을 타고 당일치기로 관광하러 온 아카네를 보고 처음 했던 생각은, 그저 ‘시골 소녀의 도시 구경인가 보다.’였다. 그래서 나는 간만의 여행을 즐겁게 만들어 주고 싶어서 평소엔 잘 먹지도 않는 디저트 샵에 간다든지, 스티커 샵에 들르는 등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카네는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이는 눈치였다. 이상했다. 분명 자기가 원해서 온 여행이고, 시골 소녀의 서울 구경이라면 상기된 눈빛으로 도시의 경관을 신기하게 바라보기 마련일 텐데. 


아카네는 싫어하진 않았지만, 마치 숙제를 하듯 하나하나 해나가는 것이었다. (이때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아카네가 돌아갈 때가 되었다. 나는 아카네를 JR 신칸센이 있는 도쿄역으로 데려다주었다. 아직 기차가 오기까진 시간이 조금 있었기에, 역 주변의 긴자를 걸으며 아카네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선 깨달았다. 오늘 내가 이 아이와 보냈던 시간은 참으로 희귀한 경험이었단 걸.


나는 아카네에게 지금껏 몇 개의 나라들을 여행했는지를 물어보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호주, 네덜란드…. 쭉쭉 나오더니 못해도 스무 개는 넘는 나라들을 여행해봤단다. 어라? 아직 성인이 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많이? 그녀는 자기 부모님이 해외 출장을 많이 가셔서 매번 따라가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했다.


“실례가 아니라면 부모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버지가 회사를 경영하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자기 조부가 일본 맥주 기업의 회장님이라면서, 얼마 안 가 기업의 경영권을 물려받을 예정이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느 기업이냐고 물어보자, 말하면 누구나 알만한 브랜드라면서, 직접 이름을 언급하는 건 피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아카네는 퍽 진지한 아이였기에, 허세를 부리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님이 느껴졌다. 


이어서 그녀는 본인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집안 어른들은 모두 일류 대학 출신인데,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다 일본 최고의 대학교를 졸업했기에 자연스럽게 아카네도 명문대에 진학하기를 바라셨다고 한다. 그러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었던 오빠와는 다르게, 그녀는 공부와는 연이 아니었단다. 그래서 미술이나 체육 같은 예체능 계열로 진학을 노리거나 유학을 하러 갈 예정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직도 자기가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을 뿐더러, 억압하는 집안 분위기에 숨을 쉬기가 어렵다면서 신세 한탄을 쏟아놓는 것이었다. 여행도 그렇단다. 매번 여행 갈 때마다 옆에 경호원이 붙거나, 부모님께 감시당하곤 했기 때문에 오늘처럼 아무도 따라붙지 않고 혼자서 자유로운 여행을 즐겨본 적이 없었단다. 


그러고는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내 삶이 부러웠다면서, 이 사람이라면 마음 놓고 어른이 되기 전 첫 자유여행의 가이드를 맡겨도 될 것 같아서 오늘 도쿄에 왔다고 했다. 사실 도쿄도 처음은 당연히 아니고, 이미 여러 번 왔단다.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평가당하고 있었구나…. 이제야 낮 동안 아카네의 언행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 분주했던 시부야의 거리

신주쿠와 하라주쿠를 거닐며 다양한 브랜드의 명품 샵들을 지나던 때였다. 내가 스트릿 브랜드에 관해 얘기하자 아카네가 “응? 저거 우리 집 옷장에 많이 있는데.”라고 했다. 나는 아마도 스트릿 브랜드는 유명해서 모조품이 많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너도 부지불식간에 샀을 거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아카네 옷장의 옷들은 필시 진품일 것이다. 그런 말을 했던 게 심각하게 후회됐다. 


디저트를 먹을 때도, 웬만한 아이들은 일본 특유의 리액션 ‘에에? 스고이~’ 따위의 감탄사를 으레 내뱉기 마련인데, 짧게 고맙다고 말하고 덤덤하게 숟가락을 들던 모습도 지금에야 이해가 되었다. 사진을 찍고 싶어 하지 않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귀족학교에 다녔는데, 밖에서 외부인에게 노출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사진도 잘 찍지 않는다고 했다. 일부러 수수한 옷차림을 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기차 시간이 임박하자 그녀는 기념품을 사야 한다고 역으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모두 진실이라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아카네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들더니, 가격도 보지 않고 자기가 사고 싶은 오미야게를 닥치는 대로 구매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도쿄 바나나빵, 캐릭터 굿즈, 디저트, 등등…. 양팔로 들어도 무거울 정도로 많은 양을 샀고, 물론 내가 들어주었다. 내가 들기에도 엄청 무거운데 이걸 다 어떻게 들고 갈 거냐고 물어보자 아카네는 어차피 기사님이 와서 짐을 옮겨주시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 없다며 예사롭게 말했다. 대충 가격을 머릿속으로 계산해보았는데, 10만 엔은 족히 넘어 보였다. 나는 어쩌다가 지금 공주님의 쇼핑을 보좌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재벌가 손녀가 눈앞에 있다니….


개찰구 앞에서 아카네는 작게 고개를 기웃하며 오늘 고마웠다고 말했다. 나는 아직도 얼떨떨했지만 아카네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카네의 고충을 들으면서, 나는 아무리 재산이 많고 부족할 것 없는 삶을 살더라도 나름대로 고민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일반인의 처지에서 보면 그저 복에 겨웠다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각자의 문제는 각각 무거운 법이다. 나는 그녀에게 타인을 위한 삶을 살 필욘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부모님, 선생님, 어른들로부터 끊임없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해야만 한다.’ 수많은 훈수를 들어오지만, 사실 그들도 인생을 처음 살아보는 것은 매한가지다. 인간은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다. 그저 스스로가 행복하고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주변인들의 훈수나 사회의 시선은 어느 정도 참고할만한 것일 수는 있으나, 내 삶은 내가 개척해 나아가야만 한다. 그렇게 능동적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고, 또 다른 인연을 맺으며, 전에 없던 것들을 창조해낼 수 있다. 나는 아카네에게 고생이 많다고 달래주었다.

▲ 스카이 트리에서 바라본 도쿄의 모습. 다들 바쁘게 살아간다.

 

도쿄는 매우 바쁘게 돌아갔다. 가득 찬 지하철에 사람들이 꾸깃꾸깃 들어가고, 퇴근 시간 후의 술집에선 업무의 연장선으로 보이는 광경이 여전히 여유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누구 하나 최선을 다해서 살지 않는 이는 없다. 나와 당신도 그중에 한 명일 거다. 분주한 거리를 걷는 사이, 우리 모두에게 하고픈 말이 문득 떠올랐다.     


"다들 고생이 많아요."

이전 04화 럭키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