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 -03
다른 지역보다 숙박비가 저렴했기에 숙소를 아키하바라로 옮겼다. 만화, 게임, 애니의 성지로 여겨지는 아키하바라는 그 명성에 걸맞게 번잡했고 화려했으며, 삭막하게 돌아가는 도심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대형 스크린에서 요란하게 돌아가는 광고 문구와 알록달록한 점포들. 빌딩 한 층을 통째로 쓰는 장난감 가게와 게임센터는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행인의 발길을 멈추게 하기 충분했다.
나 역시 어렸을 때 일본 만화에 푹 빠져있었다. 밀짚모자를 눌러 쓴 고무 인간이나 수리검을 날리는 닌자가 나오는 만화들을 보면서 온갖 상상을 하고, 친구들과 주인공들의 흉내를 내며 놀곤 했지. 별 복잡한 세상사를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동심의 세계로 빠져들면 충분했던 그 시절이 사뭇 그립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의외로 거리와 건물 안에는 어른들이 훨씬 많았다. 아 참, 나도 어른이구나. 그때 그 시절 만화를 좋아하던 이들이 다들 자라나 양복 입은 사회인이 되었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며 걷고 있던 와중, 눈에 띄는 복장을 한 젊은 아르바이트생이 전단과 함께 메이드 카페를 홍보하는 모습이 보였다.
메이드 카페. 들어 본 적 있다. 유튜버들이 가서 찍은 영상을 보며 우와 저런 곳도 있구나 하며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꽤 서브컬쳐스러운 문화를 별다른 거리낌 없이 현실에서 소화하는 이들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론 나도 한번 경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었다. 그렇게 받아든 전단에 적힌 주소로 향했다.
우선 카페는 비교적 대로변에서 떨어진, 한적한 골목길의 빌딩 안에 있었다. 빌딩 입구나 엘리베이터 같은 건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여기가 정말 맞나? 이상한 곳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그래도 가게 입구까진 가보자 하고 3층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문 바로 옆에 그 메이드 카페라는 것이 나타났다.
온 천지가 분홍색 하트로 꾸며진 모습을 보자 겁이 덜컥 났다. 이거 발을 들였다가 다시 빠져나올 수 없는 세계 아닌가? 메이드와 주인님이라니. 내가 원하던 모습은 아닌데;; 들어갈지 말지를 거의 3분 가까이 문 앞에서 고민했다.
야쿠자의 차에도 탔던 나다. 뭘 겨우 이런 거에 호들갑을 떨고 그래. 인생은 경험이지, 쫄지 말자!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당당히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굳게 먹은 마음은 프릴 드레스에 리본을 단 종업원에 의해 무참히 부서지고 말았다.
“어서 오세요. 주인님!”
작위적인 제스쳐에 어지러운 인사말까지 연타를 맞으니 정신이 혼미했다. 뜨거운 혈액이 얼굴 모세혈관 곳곳에 울컥울컥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맥박이 느껴지는 수준이 아니라, 안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세상에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있다니. 조금 오버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살면서 이렇게 남사스러운 경우는 처음 접해봤다.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써봤지만 소용없었다. 종업원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낯빛으로 안내해드릴까요? 하고 물어봤다. 전력을 다해 네. 라고 대답하고 자리에 앉았다. 후. 역시 오는 게 아니었나.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메뉴판을 들여다보니 일본어와 영어로 적힌 여러 테마의 메뉴들이 있었다.
‘슈퍼 갤럭시 모에모에 콤보?’
이건 시키면 안 될 것 같았다. 아까 날 맞이했던 종업원이 강력추천하는 걸 보니 더더욱 확신이 들었다. 그래. 적진에서도 동태를 살피는 게 우선이다. 일단은 제일 간단한 걸 주문하자. 2,000엔짜리 파르페를 주문했다. 그러자 메이드 씨가 카페에 처음 왔는지를 물어보더니, 이런저런 메이드 카페만의 규칙이랄까 안내사항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우선 메이드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사진 촬영은 금지란다. 하.지.만! 여기 있는 ‘포토 모에모에 콤보’를 신청하면, 파르페와 더불어 메이드 씨와의 사진 촬영도 OK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음식이 나오면 맛있어지는 주문을 외워야만 한다고 했다. “맛있어 져라, 모에모에 큥!” 이라는 주문은 가게 안의 모두가 함께 외쳐줄 거라고 했다.
이 부분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고,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내 담당(?) 메이드 씨가 멀어진 사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종의 고정관념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으레 이런 곳에는 SNS나 커뮤니티에서 보던 소위 ‘오타쿠’들이 올 것으로 예상했었다. 각자의 취향은 존중해야만 하는 것이 당연할뿐더러 편견을 가졌던 내가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당시에는 그런 편협한 마음가짐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카페 안의 손님들은 세상 멀쩡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오타쿠를 멀쩡하지 않다고 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말끔한 정장을 갖춰 입은 아저씨뻘의 손님이나, 단아한 옷차림의 젊은 여성 손님까지, 밖에서 마주쳤으면 일말의 위화감도 없이 지나갔을 이들이지만 카페 안에서 마주하니 이토록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나는 일종의 컬쳐쇼크와 함께 내 시각이 얼마나 좁고 고리타분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과거 공산당을 욕하면서 뿔이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던 교육체제에서 자랐던 이가, 직접 북한 사람을 보니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던 일화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회사원 A 씨는 직장 근처에 이 카페가 있는데, 가끔 쉬는 시간에 기분 전환을 하러 온다고 했고, 여성 손님은 메이드 분이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보고 싶어 방문한다고 말했다. 손님들이 메이드 카페를 들르는 이유는 우리가 담배를 피우거나, 좋아하는 연예인의 콘서트를 보러 가는 일의 이유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속한 집단에서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지 모를 다른 문화도 그들의 삶 속에선 엄연히 일상의 일부이자, 자연스레 통용되는 생활 양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나는 멋모르고 타인들로부터 형성된 ‘이미지’만을 이유로 알게 모르게 고정관념을 가진 채 살아왔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아까 문 앞에서 느꼈던 부끄러움보다 더 크게 말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파르페가 나왔을 때 ‘모에모에 큥!’을 외쳐야 하는 규칙은 적잖이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내가 말문이 막혀 입을 못 떼고 있자, 메이드 씨가 가게 안의 손님들을 향해 외쳤다.
“여기 한국에서 오신 손님이 주문을 외우질 못하시네요~! 여러분들이 같이 도와주실까요~?”
가게 안의 모두가 나를 쳐다봤고 손동작과 함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맛있어 져라! 모에모에 큥!”
우와. 이거 안 따라 하면 벌이 크구나. 대충 얼버무리면 넘어갈 것으로 예상했던 게 막심하게 후회됐다. 그다음부턴 영락없이 모에모에 큥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가서 숨고 싶었다. 물론 쥐로 변하려면 또 이런 식의 주문을 외워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파르페는 굉장히 달아서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다. 와인 한 잔을 더 하고 가게를 나왔다. 이런 경험은 평생 다시 못해볼 것만 같았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여행하면서 접하는 컬쳐쇼크 혹은 문화적 괴리감을 이해하고 수용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또, 매체나 언론에서 접한 이미지만으로 대상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 역시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외부인과 낯선 문화를 접하게 된다. 인간은 외부인을 보면 경계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므로 기본적으로 그들의 풍습이나 문화, 습관을 무의식적으로 비하하거나 이상한 것으로 치부하고 만다.
그러나 겪어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외모, 국적, 나이, 종교가 달라도 모두가 평등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각자가 살아온 배경이 다르기에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서로에 대한 비난과 편견은 지양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런 성숙한 마음가짐을 모두가 가지게 된다면 언젠가 사랑과 평화가 우리 사회에 꽃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