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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기쁨 Oct 20. 2022

외국인

도호쿠 -01

도쿄의 북쪽 사이타마현을 넘어 우츠노미야란 곳까지 왔다. 어린이 놀이터에 텐트를 피고 잠을 청하는데, 등이 시려 숙면하기가 힘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바닥에 까는 에어매트 한 군데에 구멍이 뚫려 줄곧 찬 바닥에 몸을 두었던 까닭이었다. 텐트 밖으로 나오니 찬 바람이 옷 틈을 파고들었다. 새삼 겨울이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나마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걸으니 금방 열이 나서 다행일까. 동이 트고서 휴게소만 세 개를 지났다. 점심으로 인스턴트 라멘을 후루룩거리고 있었는데, 한 아주머니가 힘내라며 흑설탕이 든 팥빵을 건네주셨다. 이런 작은 배려와 응원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 매일 아침 이러고 잤다.


우츠노미야시 북부 도치기현의 나스군이라는 곳에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운전자분은 조금 특별했다. Abi 씨는 큰 키와 검은 피부의 외국인이었다. 그의 아내 사토미 씨는 일본인으로, 국제 커플인 셈이다. Abi 씨는 에티오피아 출신인데, 십 년 전에 일본에 들어와 지금은 사토미 씨와 결혼해서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타지에서 살면 힘들진 않은지 물어봤다. 그는 당연히 고되다고 답했다. 외국인의 입장으로 살면 어떤 방식으로든 차별과 마주하기 마련일뿐더러, 사고방식, 생활 양식 등의 차이가 세세한 부분까지 스트레스로 남는다고 했다. 언어의 불편함과 더불어 언제나 소수자의 위치가 되는 외지생활이란 힐끗 들어도 굉장히 힘겨울 것만 같았다. (그리고 후일 호주에서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ㅠㅠ) 


그렇지만 Abi 씨는 그러한 난관을 사랑의 힘으로 극복했고, 사토미 씨와 함께 행복한 미래를 그리고 계셨다. 사토미 씨는 Abi 씨의 순수함과 상냥함에 반했다고 했다. 두 분은 꽁지깃을 마주 대고 강물을 거니는 원앙 한 쌍처럼 사이가 좋아 보였다. 국적이나 나이, 성별을 초월하는 게 사랑이라 했던가. 두 분의 모습을 보면서 실로 그 말이 사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Abi 씨는 말수가 적고 진중한 편이셨고 반면 사토미 씨는 생기 넘치는 성격이셨기에 상호보완이 되는 듯했다. 나는 의사소통에서 불편함을 겪진 않는지 여쭤봤다. 그러자 사토미 씨가 그 정도는 당연히 극복해야 하는 것이라며, 오히려 다툴 일이 있을 때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함께 사전을 찾으면서 도중에 화가 누그러질 때도 있다고 말했다. 하긴, 같은 나라 사람끼리도 말이 안 통하거나 의미가 엇갈려서 싸우는 일이 다반사긴 하다. 또, 부정적인 말은 차라리 뜻을 몰라버리는 편이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언어 장벽이란 현실적인 장애물이 대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년가약을 맺는 국제 커플의 용기야말로 진정한 사랑에 한층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삼십 년의 세월 간 다른 지역, 다른 배경에서 자라 온 한 쌍의 커플이 습관, 취향, 관심사 등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일치할 리는 만무하다. 아니, 어쩌면 0%에 가깝다. 80억의 인류는 각자가 너무도 다양하고 독특해서, 차라리 유전자가 일치하는 사례를 찾는 편이 빠를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만나서 다투는 일과 더불어, 서로의 갈등을 조율해나가는 과정은 필수 불가결하다. 현실에선 백마 탄 왕자님이나 성안의 공주님 따위 없다. 우리는 그저, 상대방의 부족한 점까지도 품어가며 인생의 거센 풍랑을 배우자와 함께 한 너울씩 견디어 나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Abi 씨와 사토미 씨는 참된 동반자처럼 보였다.

▲ 사토미 씨와 Abi 씨. 국경을 초월한 커플이셨다.


두 분은 센다이 옆의 작은 마을인 야마가타 시에 살았다. 도착하고 나니 벌써 저녁이었다. 사토미 씨는 내게 저녁으로 우동을 사주시고 날씨가 춥다며 외투도 한 벌 건네주셨다. 나야 야마가타에서 다시 여정을 이어나가도 괜찮았지만, 잘 곳도 마땅하지 않고 도로가 투박한 야마가타에 날 두고 가기가 적잖이 걱정되셨는지 어느샌가 센다이로 가는 버스표를 끊어서 내게 건네주시는 것이었다. 오직 도보와 히치하이킹 만을 이용해 일본 일주를 하겠다는 나와의 약속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Abi 씨의 의견은 완고했다. 아랫지방과 다르게 여기서부터는 대단히 추울뿐더러 중앙 도로가 아닌 시골 도로라 걷기도 절대 쉽지 않을 거란다. 정 싫다면 내일 아침에 차로 태워다 주겠다고까지 말씀하셨기에, 이 이상으로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그저 버스에 타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사토미 씨는 5,000엔 지폐를 건네주시며 마지막까지 무사하라는 말과 함께 꼭 안아 주셨다. Abi 씨의 손은 커서 악수했을 때 내 손이 전부 감싸졌다. 그는 외국인으로서의 입장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듯했다. 인간은 같은 상황이 돼 보지 않으면 상대를 깊게 이해할 수 없다고 했던가. 나와 Abi 씨는 국적도 나이도 외모도 달랐지만, 이 순간 형제처럼 느껴졌다. Be careful, Joy. 그의 따듯한 한마디에 용기와 각오가 샘솟았다. 차창 너머 부부의 눈길은 마치 우리 엄마 아빠가 날 바라보는 눈빛과 같은 데가 있었다.

    

서로 다른 여러 나라 사람들의 습속을 조금이라도 아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습속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 또 아무것도 본 것이 없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우리들의 생활방식에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나 우습고 이성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좋은 일이다.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당장 국경 하나만 넘어도 우리는 모두 외국인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외국인에게 다정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차별과 혐오의 화살은 쏜 만큼 그대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고, 처음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다짐했을 때에도 그 대상은 우리나라였다. 그렇지만 여행을 하면서, 국적조차도 사랑과 평화의 논리 앞에는 한낱 여권 속 글귀 차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Abi 씨와 사토미 씨의 사랑처럼 우리는 모두가 서로 사랑할 수 있다.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혼란스러운 국제정세 안에서 신냉전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때때로 암울하기도 하다. 하지만 난 믿는다. 조금씩 인류애의 씨앗이 퍼져 나가면 척박한 사막을 기름진 옥토로 만들 수 있다고. 그리고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 또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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