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스턴스'의 엔딩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입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엔딩은 뭐지?" 엘리자베스의 얼굴 조각이 별에 안착하고 녹아내릴 때 주변 관객들의 환호 소리를 들으며 의아해졌다. 물론 이 영화 3막의 어떠한 부분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새해 전야 쇼의 피바다가 시작될 땐 나름 속으로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처럼 가는구나"하고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예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스터즈' 속 히틀러처럼 하비의 얼굴이 벌집이 되어버리는 대신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별 위로 돌아왔을 때 묘한 답답함을 느꼈다. 이 영화는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회유된 개인을 탓하는 건가. 그렇다면 분노의 방향이 잘못된 것 아닌가. 더 직접적일래야 직접적일 수 없는 영화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혼란에 빠졌다.
마지막 3막에선 영화 속 세계에 대한 일갈, 엘리자수에 대한 조롱, 그리고 엘리자수에 대한 연민이 섞여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피바다의 직접적인 레퍼런스로 보이는 '캐리'와 비교하면 이 혼란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캐리'에서는 따돌림 당하는 주인공 캐리에 대한 연민 그리고 마침내 폭발한 캐리가 가해자들을 상대로 복수를 자행할 때의 쾌감이 뚜렷한 반면, '서브스턴스'의 카타르시스는 엘리자수의 복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피는 시선을 휘두른 사람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선의 대상인 그녀의 붕괴에서 분출된다. 생각해보면 엘리자수의 탄생부터 영화가 엘리자수를 바라보는 태도는 엘리자베스 혹은 수를 바라보는 각각의 태도와 다르다. 1막에서 엘리자베스는 들떠있는 초현실적 세계에서 관객이 유일하게 마음 붙일 구석이다. 엘리자베스는 발을 땅에 붙이고 있는 캐릭터이다. 스크린타임 대부분 단독으로 등장하는 데미 무어는 배우들 중 유일하게 가라앉은 연기 톤을 유지하고 대사량은 극도로 적다. 대신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가족도, 친구도 아는 게 하나 없지만 거울에 비친 표정으로 우리는 그녀의 감정을 즉각적으로 이해한다. 차분해서 더 슬퍼보이는 울상과 더불어 데미 무어라는 90년대 할리우드 아이콘을 캐스팅하며 끌고 들어오는 영화 밖 맥락은 엘리자베스를 단순히 '한물간 퇴물1'로 치부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체성을 부여한다. 그렇게 그녀는 감정 이입의 대상이 된다. 적어도 수에게 젊음을 뺏기면서부터 말이 많아지고 자아가 분열되고 과격한 장르적 캐릭터가 되기 전까진 말이다. 반면, 젊음을 앗아가는 수는 에너제틱하고 섹시하다. '섹시한 젊은 여자 신예'. 그것이 전부다. 그렇기에 젊은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의 과거 라이벌 등 연예계 상위 포식자의 여러 전형을 갖다 붙여도 말이 된다. 수는 하비를 비롯한 다른 남자 캐릭터들과 마찬가지로 한가지 특성이 과장된 캐리커쳐며 마음 붙일 캐릭터라기보단 우화적 인물 유형 또는 노골적인 상징이다. 즉, 풍자의 대상이다.
감정 이입과 풍자를 거쳐 3막에 도달하면 엘리자베수와 수, 감정이입과 풍자가 섞여버린다. 이 둘이 섞인 결과는 충격, 당황, 놀람, 멍함이다. 어쩔 줄 모르겠는 관객이 흉측한 무언가를 보고 충격에서 헤매고 있는 와중 영화는 그녀를 '몬스트로 엘리자수', 즉 괴물로 발빠르게 명명해 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현기증'의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와중에 바로 꽃단장을 시작한다. 상황의 터무니 없음에 웃음이 나온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녀는 어떻게 자포자기하지 않고 꽃단장을 하는걸까. 자신이 '괴물'이란 걸 알고 있는 걸까. 이건 웃으라는 걸까. 울라는 걸까.
감독은 엘리자수가 왜 포기하지 않고 무대에 올라갔는지 이해시키는데 관심이 없다. 영화의 혼란스러운 태도에 시치미 뗀 채 그녀를 무대에 올려 터트리고 싶어할 뿐이다. 그렇게 엘리자수는 캐릭터로서 정체성이 불분명한채 아슬아슬하게 버티다 금세 터져버린다. 캐릭터가 없어지고 피만 남는다. 2막까지만 해도 얕게라도 존재했던 인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캐릭터를 더 이상 찾아보는 건 무리다. 이야기의 동력은 더 이상 캐릭터가 아니라 전복적인 폭주이며 감정 이입할 '서사'가 아니라 말그대로 구경할 '쇼'다. 여기서 멈췄으면 이 영화는 '점점 캐릭터성을 납작하게 하다 피만 남긴 채 폭주하는 영화'로 깔끔하게 정리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마지막에 갑자기 노선을 확실히 한다. 섞여버리고 불분명하던 엘리자수에서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발라내면서까지 다시 엘리자베스를 소환한다. 피범벅에서 고기덩어리로, 액체에서 고체로 회귀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물간 퇴물이라는 걸 잊지 말라는 듯이, 바로 앞의 '쇼'에서 휘발되었던 캐릭터성, 흐트려버렸던 이야기의 주체를 갑자기 다시 끌고 들어온다. 물론 이야기 전체를 하나로 묶는 깔끔한 엔딩이며 근사한 수미상관이다. 하지만 이 수미상관의 쾌감이 앞의 전복의 카타르시스과 충돌한다.
엔딩의 논리에 따르면 '바스터즈'의 히틀러가 '서브스턴스'의 하비라는 건 착각이다. '서브스턴스'의 악당은 사람이 아니라 더 큰 틀, 보이지 않는 시스템이다. 종국엔 감독 스스로가 악당을 자처하고 전지적 시점에서 내려다보며 캐첩처럼 된 살 조각을 지운다. 악당은 승리했다. 시스템은 무관심하고 냉정하다. 그녀의 폭발에도 불구하고 피는 방송 스튜디오 안에서만 흘렀고 바깥 세상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멀쩡하다. 녹아버린 살덩어리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구태여 악당의 승리로 이야기를 끝낼 때 남는 뒷맛은 '쇼'의 전복적 카타르시스가 아닌 수미상관의 찝찝한 쾌감이다. 나는 이 수미상관이 앞선 '폭발'을 세계에 대한 일갈이 아닌 욕심을 버리지 못한 괴물에 대한 단죄로 단순화시켜버린다고 주장하고 싶다. 물론 기어다니는 얼굴 조각을 보며 불쾌해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너무 진지하게 볼 게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2막의 풍자, 3막의 혼란을 겪으면서도 나를 이 세계에 매달아둔 동아줄인 엘리자베스에 1막의 감정 이입을 버리지 못했다. 거울을 보며 얼굴을 찢어버리듯 화장을 지우던 때의 고통과 슬픔에서 멀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그 고통스러운 '화장 지워버리기'가 잔인하고 굴욕적인 '캐첩 지워버리기'의 복선이었다는 게 허무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브스턴스'는 ‘지독하게 자조적인 블랙코미디'보다 ‘갈팡질팡하다 가학적 쾌락에 탐닉하는 호러'가 더 잘 어울리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