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행복하세요? 점수로 매겨보세요." 수면제만 얻어가려는 방어적인 태도의 환자에게 상담사 제리는 묻는다. 이 여자는 자신이 왜 불행한지 설명하지 못한다(혹은 하기 싫어한다). 점수는 그러한 그녀의 불행한 상태를 어떻게든 구체화해 불면의 원인을 발굴하려는 제리의 노력이다. 하지만 끝내 '돌파구'는 나타나지 않고 그녀는 다시 돌아올거냐는 질문에 대답 없이 떠나버린다. 그 뒷모습이 불행한 여자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녀의 주름진 고뇌에 관객이 갖게 된 호기심에 배반하듯 오프닝 상담 장면이 끝나고 관객이 따라가는 인물은 행복의 최하점에 있다는 고백을 한 여자가 아니라 그녀를 상담하던 여자 제리다. 이후 네 개의 계절이 지나고 또다른 한해가 지나가는 동안 우리는 제리와 그녀의 남편 톰, 아들 조로 구성된 런던의 한 행복한 가족의 일상과 그들 주변의 이러저러하게 불행한 인물들을 관찰한다.
'세상의 모든 계절'은 불행의 원인을 알려주지 않는다. 관심이 없다기 보단 모른다는 태도에 가까워 보인다. 대신 그들의 증상은 매우 자세하게 제시된다. 그들이 어떻게 거짓말을 하고, 좌절을 무릅쓰고 어떤 기대를 하고, 왜 남들보다 많은 술을 마시는지 그들의 얼굴에는 투명하게 드러난다. 불행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불안은 원해선 안될 것을 원하게 만든다. 그렇게 더 불행해진다. 눈을 뗄 수 없는 교통사고 같은 그들의 불행의 굴레를 보여준 후 붙는 제리와 톰의 침대맡 대화는 이에 대한 감독의 코멘트다.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그치." 개입하지 않을 일은 개입하지 않은 채 짧은 소감을 남기고 지나간다.
계절과 농사보듯 인간관계를 관찰하는 이 영화에서 수확은 그저 규칙적으로 재료를 얻는 행위이며 그 외의 의미는 없다. 이야기 상의 수확도 그렇다. 인물의 변화로 일컬어지는 드라마가 없다. 감정의 낙차와 이야기 매듭을 통해 무언가를 안겨주려 하지 않는다. 메리는 처음부터 남자에게 터무니 없는 기대를 품고 혼자 무작정 실망해버리는 여자였으며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는 제리는 보기 좋은 가족을 처음부터 끝까지 갖고 있다. 제리와 톰의 집에 왔다 떠나는 여럿 인물들도 그들 각자의 것을 스스로의 품에 안고만 있다. 새로운 걸 얹지도 않고 자신의 재량에 넘치는 걸 끌어안고 있더라도 넘친 만큼만 흐를 뿐 갑자기 폭발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서사의 장치로서 캐릭터를 연기한다기보다 살아있는 인간을 포착한 것처럼 느껴지는 배우들의 열연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짜 수확물이다.
그중 '진짜'를 꼽으라면 단연 레슬리 맨빌이다. 레슬리 맨빌이 일궈낸 건 인간의 소외가 불러올 수 있는 고통의 깊이, 그걸 증명하는 여자의 얼굴이다. 다만 이걸 자승자박이라고 부르고 그 여자를 비웃는 건 너무 가혹하다. 카메라가 다른 인물을 잘라내고 메리를 향해 가까워지는 건 메리를 가두고 추궁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메리일까봐 두렵고 제리이고 싶은 우리를 아찔하게 하는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프닝에 사라져버린 여자가 겪는 불행의 원인을 궁금해하는 우리에게 영화는 메리를 통해 덤덤하게 말한다. 그냥 그렇다고, 풍요로운 행복이 있듯 풍요로운 불행도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