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영화를 보지 않는다는 사람, 책을 안 읽는다는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지하철 안내음부터 가게의 배경음, 이어폰으로 혼자 듣는 노래까지, 음악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갖가지 방식으로 붙어 있다. 청각 기관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에 무조건 반응하고 원하는 때에만 선택적으로 켜놓을 수 없기 때문에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상을 살아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모든 음악을 소음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소음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거슬리고 싫어하는 소리는 음악이 아닌가? 음악, 우리가 예술로 받아들이는 소리는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 할까? 가장 폭넓게, 추상적으로 생각해보면 이야기다. 음악은 시간의 예술, 즉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소리가 지속되거나 바뀌고 방금 전 소리와 지금 들리는 소리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다. 이 논리에 따르면 소음을 불쾌하게 만드는 건 그 속의 이야기의 부재, 정확히는 불화하는 이야기 요소들로 인한 예술성의 부재다. 그렇다면 음악과 소음의 경계는 무엇일까? 화성적 조화를 이루지 않은 일상음은 음악이 될 수 없을까?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 중 첫 관람작이자 지금까지 내게 가장 독특한 극장 경험 중 하나로 손꼽을 수 있는 메모리아는 일상에 존재하는, 우리의 주변에 흐르는 모든 것이 음악이고 모든 것에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진보적인 주장을 제시한다. 그리고 나는 이 주장과 그것을 담아낸 영화적 논리에 완전히 감복되었다.
‘극단적 슬로우 시네마’. 메모리아를 관람하기 전 나를 겁먹게 한 관람객 평가란의 상단 수식어이다. 영화를 고르는데 가장 중요한 선택 기준이 시간 낭비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루하다’ 라는 감상, ‘느린’, 영어로는 ‘slow burn’ 같은 수식어가 붙는 영화들은 많은 경우 피한다. 같은 시간에 담긴 것이 적다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느린 영화들을 보고 나면 느리다는 것이 영화의 주된 비판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늘어지는 리듬으로 관객의 집중력을 재빨리 고갈되게 만든다는 것인데, 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지만 영화를 비난하는 지나치게 간단하고 쉬운 핑계이기도 하다. 어쨌든 느린 영화들은 빠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그 리듬의 존재 목적을 증명하고 관객을 설득해야 한다. 메모리아가 이에 성공한 방식이자 메모리아를 보고 나서 가장 의외였던 부분은 영화의 체험적 측면이었다. 주로 느린 영화들은 지적인, 감정적인 유희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데, 메모리아는 역동적인 카메라, 화려한 편집 등을 이용해 관객을 주인공의 자리에 놓고 인물이 느끼는 것을 고스란히 전달하려는 어떠한 영화들(대표적으로 그래비티, 문라이트)만큼이나 체험적이었다. 고정된 카메라는 인물이 서있는 공간의 바닥부터 천장까지 모두 담으며 그 안의 공기를 그대로 전달한다. 현실을 가공하지 않고 담아낸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이라 부를 수 있지만 그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다. 작은 돌에도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을 믿듯 공간의 콘크리트, 나무가 만들어내는 앰비언스가 가공되지 않은 소리임에도 신비한 기운을 뿜어내기 때문이다. 극단적 슬로우 시네마라는 것이 이때 효과적으로 작용하는데, 일상을 화려하게 편집한 어떤 것이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것처럼 극도로 느리게 만든 것 또한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것이다. 길게 연장된 장면에서 인물의 작은 움직임에 더 집중하게 되고 공간에 깔려있는 배경음의 변화들에 민감해진다. 결국 관객이 제시카의 예민한 감각을 그대로 이어받고 극의 마지막에 가서는 에르난이라는 기억장치로부터 제시카라는 안테나가 전송받은 세상이 모든 소리, 이야기, 음악 또한 이어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