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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버프 Feb 22. 2023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 사실 혹은 환상

늦은 밤 마사의 아버지, 대학 총장의 집에서 파티가 끝난 후 마사, 조지 부부는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이미 술에 취했는데 통제되지 않은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둘 중 마사가 더 취한 상태로 보인다. 마사의 성격은 손을 크게 휘젓는 제스처와 음식을 먹으면서 시끄럽게 얘기하는 것에서 드러나듯 ‘천박’하다. 반면에 조지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생각나는 대로 입 밖으로 내뱉으며 공격적인 태도로 비난하는 마사를 조지는 농담 투로 받아준다. 조지가 이내 반감을 표하는 유일한 것은 닉, 하니 부부를 집으로 불렀다고 마사가 말할 때이다. 이것이 불편한 이유는 늦은 시간, 더 중요하게는 마사가 젊은 남자 닉에게 성적 끌림을 느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지는 나이 든 신체를 가진 중년 남자로서 닉의 외모에 호감을 표하는 하는 마사에 불편함을 표한다.

닉 하니 부부가 집에 도착하자 조지에게는 그전에 없던 활력이 생긴다. 이때부터 영화 끝까지 계속되는 조지의 수동적 공격이 시작된다. 조지는 마사와 다르게 직접적인 비난을 하지 않는다. 분노를 공격적 냉소로 드러나며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고 좋은 손님으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싶은 상대방을 곤란하게 하며 즐긴다.



마사와 조지의 기싸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마사는 조지의 무능력, 남성성 결여를 꼬집는 에피소드를 손님들 앞에서 농담거리로 꺼내고 조지는 엽총 모양 우산으로 죽여버리겠다는 농담을 한다. 거기에 이어 마사의 스킨십 요구를 들어주는 척 수치심을 주며 싸움의 주도권을 가져온다. 아들 이야기가 이어 언급되며 조지가 마사를 곤란하게 하지만 마사가 아들의 눈 색과 관련되어 조지의 무능함을 다시 한번 지적한다. 손님이 어지러워 토할 때까지 지속되는 이 기싸움은 밤새 이어지는 파티 내내 계속되는데, 요약하면 마사는 조지의 ‘남자’로서의 무능함을 손님들 앞에서 떠벌리고 조지는 이에 대한 반격으로 아이에 대해 지적하거나 드문 분출되는 폭력으로 마사를 경고하는 식이다.

마사와 조지의 과거 역사가 관객에게 밝혀지면서 부부의 관계 양상을 단순하게 요약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둘의 관계는 꼬리에 꼬리를 문 수십 년 간의 폭언의 결과이고 굳어진 싸움 방식이다. 관객은 하룻밤 동안 이 부부와 함께하지만 부부의 어지러운 싸움은 이 날 뿐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오래 묵혀 썩은 둘의 관계에 대한 정보는 정신없게 쏟아지는 대화 안에 흩어져 있다. 조지의 과거는 자신의 입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을 통해 굴욕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폭로된다. 부모 살인, 출세의 좌절, 소설 발매의 실패 같은 조지의 과거는 마사가 조지에 대해 사용하는 무기이다. 반면 조지는 마사의 현재 ‘천박한’ 태도를 비난한다. 조지를 만나기 전 마사의 과거사에는 조지가 꼬투리 잡을 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에 결국 밝혀지듯, 조지와의 관계에서 만들어낸 아이라는 커다란 비밀이 마사에 대해 조지가 쥐고 있던 가장 큰 무기다.



둘의 과거를 추측해 보면, 마사가 대학 총장의 딸로 조지를 처음 만났을 때 마사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지는 마사가 조건에 충족하는 여자였기 때문에 그녀의 사랑을 승인해 결혼했을 것이다. 마사는 조지가 자신을 출세의 사다리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 조지도 마사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조지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진심을 주방에서 닉에게 고백할 때 말하듯, 조지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벌주고 싶어 한다. 조지는 수동적인 사람이다. 부모의 죽음에 연관된 어두운 과거를 가진 아이였던 그는 드문드문 분출되는 폭력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드러나지 않을 때에는 정상인의 얼굴로 가린 채 살아간다. 그는 ‘버긴’ 말실수를 애써 웃어넘기듯 아빠를 죽인 충격에도 웃어버렸으며 이 이야기는 제삼자의 이야기처럼 간접적으로만 고백된다. 마사에게 선택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사의 공격이 시작되고 장인어른을 통한 출세도 좌절되자 그는 그의 껍데기 안으로 더 기어들어갔을 것이다. 조지의 수동적 공격 전략은 마사의 키스를 받아주지 않는 것과 같은 욕구 좌절을 통한 처벌이다. 마사는 이에 조지의 무능력을 비웃는 방식으로 반격하는, 악순환이다.



결국 둘은 현실 도피로 미치는 것을 선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마사와 조지는 서로만의 비밀로 아이를 만든다. 사랑이라는 환상이 바닥난 상황에서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을 것이다. 조건들이 어느 정도로 세부적으로 정해졌는지는 불확실하지만 확실한 원칙은 ‘다른 사람 앞에서 언급하지 말 것’이다. 마사의 음주 습관과 평소 언행을 보면 마사가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파티의 끝자락에서 몇 번씩 아이에 대한 정보를 흘렸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때 마사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오면 조지는 순간적으로 주도권을 잡게 된다. 결국 아이는 마사에게는 결혼 생활을 버티게 해주는 한줄기의 희망, 조지에게는 마사를 쥐고 흔드는 주도권을 주는 장치였던 것이다.



사실 혹은 환상, 마사에게 둘은 구분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영화의 특정 시간에 마사가 사실과 환상, 둘 중 어느 것을 얼마큼 선택하는지는 매번 다르다. 술을 마셔 오락가락하는 이성처럼 환상에 종속된 정도는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마사가 현실에 두발을 딛고 서있는 사람은 분명히 아니지만 완전히 환상으로 가득 찬 사람도 아니다. 아들에 대한 비밀 계약을 했다는 것 자체가 그 둘은 아들의 허구성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사는 자신이 현실을 버티기 위해 환상을 택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거짓된 환상과 현실의 자기 인식이 공존하는 모순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술이다. 고야의 작품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에서 잠든 남자 주위를 동물들이 날아다니듯, 술 취한 마사 주위에는 조지와 아이가 날아다닌다.

마지막 장면에서 마사는 아들이라는 환상의 종식을 자기 맘대로 선언하는 조지에 반박하지 못한다. 아이의 눈 색, 아이가 지속적으로 토하는 이유 같은 세부사항들과 다르게 가짜라는 본질에는 반박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가짜인 것을 가짜라고 말하는 조지에게 마사가 할 수 있는 말은 “당신이 이러면 안 돼”, 처절한 호소뿐이다. 조지와 마사가 핵심 원칙, “다른 사람 앞에서 언급하지 말 것”을 정한 이유는 가짜를 가짜로 유지하고 둘의 관계를 벗어난 세계에서는 성립할 수 없는, 둘 사이에 동의한 환상을 지속하기 위해서이다. 마사가 술에 취해 가짜를 밖으로 내뱉는 것은 사실과 환상의 경계에 서게 해주는 술의 힘을 빌려 가짜를 가짜로 유지하는 원칙을 깨고 그것을 사실로 만들려는 시도다. 마사의 외도를 확신하고 조지는 그 아이를 죽여 가짜 이야기를 끝내고 마사의 취기를 한 번에 벗겨낸다. 조지는 아버지를 죽인 같은 방식으로 - 차에 탄 채로 나무를 박아- 아이를 죽인다. 이는 트라우마를 다룬 자신의 이야기를 내친 마사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죽임으로써 하는 최종적인 복수이고 조지의 간헐적 폭력이 지금껏 작동해 온 방식일 것이다.  



영화의 제목,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마사가 아버지의 파티에서 꺼낸 농담으로 영화에서 총 네 번 언급되는데, ‘누가 무서운 늑대를 두려워하랴’라는 영어 표현의 변형으로 버지니아 울프가 사람들의 가면 뒤의 진실을 드러내는 묘사에 집중한 작가라는 점에 빗대어 결국 ‘누가 환상 없이 사는 것을 두려워하나’의 뜻이다. 처음 두 번의 언급은 마사가 이전 파티에서의 농담을 되풀이하며 농담이 먹혔는지 확인하는 용도이고 세 번째는 마사의 말을 덮기 위해 조지가 내는 소음이다. 마지막에 조지는 농담을 하던 당사자에게 질문으로 바꿔 묻는다. 그 질문에 대한 마사의 대답은 그녀의 패배 선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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