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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토프 Aug 06. 2021

 가장 열심히 살았던 나의 25살

그때의 나-7

대학시절, 친구 하나가 학원강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며 문제집을 들고 왔다. 삼각형 내각을 구하는 문제였는데 풀기 힘들었는지 다른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풀다 보니 답 구해졌다. 그때 나는 주말에 시급 2800원에 과일빙수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방학에는 시급 2100원을 받고 카페에서 오전, 점심시간 일을 했다. 친구에게 들어보니 학원강사로 버는 돈이 꽤 괜찮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4학년이 되었다. 대학원에 갈지, 제약회사 영업부서에 들어갈지 두 가지가 큰 선택지였다. 대학원은 이미 포화상태였고, 교수 자리도 20년 전 학번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가 설 자리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그리고, 졸업논문을 준비하다 보니 나에게 연구직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제약회사 영업부서는 그냥 애초부터 나의 선택지에는 없었다. 월급도 많고, 영업용 차량도 주어진다며 선배들은 꽤 괜찮다고 추천했다. 나는 그때만 해도 사람들 앞에서 마음에 없지만 남이 들으면 기분 좋을 소리도 못했고, 마음을 열만 한 능력도 없었다. 그래서 너무나도 자신이 없었다.



그저 돈을 빨리 벌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때 학원강사가 떠올랐다. 4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강사 구인구직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렸다. 그리고 운 좋게도 대형학원에 질린 원장 선생님을 만나 편하게 첫 강사생활을 시작했다. 시험 전, 후 상담전화가 필수인 학원들이 많은데, 이곳은 학부모가 원할 때 말고는 먼저 걸지 않았다. 동생 둘을 가르친 경험과 당시 프레젠테이션 실력이 월등히 상승곡선을 탈 때라 다른 직업들보다 자신이 있었다. (교양과목 교수님이 여태 본 발표 중에 최고였다고 칭찬해 주신적이 있었다.) 막상 해보니 너무 긴장돼서 첫날은 벌벌 떨었지만 안 잘리고 고비를  잘 넘겼다. 의식 수업 이어도 소수정예라 금방 적응했다. 내 덕은 아니었고, 재원수가 늘어서 확장 이전을 했다. 그러다 어느 달부터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다. 손익분기점을 못 넘긴 것인지는 잘 몰랐지만, 서너 달 밀리기 시작하니까 좋은 곳인 줄 알면서도 나도 돈이 필요했기에 옮길 수밖에 없었다.


옮겨간 곳은 단과학원이지만 수학 과목 강사만 열명이 넘는 대형학원이었다. 이곳은 오래 다니지 못했다. 둘이 있던 곳에서 직급이 존재하는 학원에 입사하니,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저 가르치는 것에 중점을 뒀던 나와는 맞지 않는 곳이었다. 강사들이 모두 똑같은 스타일로 가르치길 원했고, 무엇보다도 자기 어릴 적 보는 것 같다며 나를 벼랑 끝에 몰아넣는 팀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의 매일을 다른 강사들 있는 곳에서 혼났다. 모르면 가르쳐주면 되는 것을. 한 번은 울고 있는 내게, 팀장보다도 열 살은 많은 선생님이 위로를 해주셨는데, 그분도 그렇게 많이 당했다며 참 기분 더러웠다고, 두세 달만 참으면 된다고 그러셨다. 그쯤 되니, 내가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조금 들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강사는 말을 하는 직업임에도 에너지 소모가 상당하다.  친구들 만나 수다를 두 시간만 해도 허기가 지는데, 6시간 이상을 매일 떠들어야 하니 살기 위해서 입에 먹을 것을 넣어야 했다. 그런데 방학이 시작되고, 휴가 가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보강하느라 화장실 갈 시간도 나지 않았다. 위는 점점 쓰리기 시작했고, 불현듯 처음 직장에서의 원장 선생님 말씀이 떠올랐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좀 먹자.


딱 세 달을 하고, 더 공부해야겠다는 핑계로 사직서를 냈다. 밥도 못 먹고 일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교무실에서 초코바 하나도 먹지 못하게 했다. 후에 들은 얘기로는 내발로 나온 것인데, 내 실력이 부족해서 잘린 것으로 학부모에게 나의 퇴사를 전달했다고 한다.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 그러던 중 가르치던 반 아이가 어떻게 알았는지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 왜 그만두셨어요. 선생님 만나서 정말 좋았어요. 이해하기 쉽게 설명도 잘해주시고, 오래 같이하고 싶었는데  아쉬워요. 다시 오시면 안돼요?


이 학원은 강사와 학생 사이가 돈독한 편은 아니다. 사적인 대화는 암묵적으로 금지된 곳이었다. 그런데도, 나에게 저런 마음을 보여준 것이 고맙기도 하고, 괘씸했던 팀장에게 복수한 것 같아 통쾌하기도 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해도 아이들은 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퇴사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학원에서 시강과 면접을 보게 되었다. 종합반은 처음이었지만 스무 명 내외에 한 학년당 두 학급, 중학교 1,2, 3학년 과정을 동시에 가르치는 것이 힘들 것 같지 않았고, 단기간에 내 실력과 경험을 많이 쌓을 수 있는 기회였다. 시강 후 면접을 보는 자리에 부원장님만 계셨는데. 원하는 월급 금액을 쓰라고 하셨다. 매번 정해놓은 페이에 응하는 위치이기도 하고, 한 번도 내가 먼저 받고 싶은 금액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전에 일했던 곳보다 30만 원을 더 써서 서류를 내고,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있다며 말씀드렸다.


8시간 강의해도 좋으니 밥 먹는 시간은 꼭 챙겨주세요.


이력서에도 밥 먹을 시간은 30분이라도 좋으니, 꼭 지켜주는 곳이면 좋겠다고 썼다.

부원장님은 크게 웃으시며,


그럼요~여기 배달 맛집 많아요. 우리는 수업 전에 교무실에서 각자 알아서 시켜먹고 그래요~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먹어야죠. 기운이 있어야 더 잘 가르치죠.


다행히도 밥에 대한 생각이 같았고, 시험대비 기간에도 풍족한 야식을 챙겨주시며, 강사들에게 아낌없이 지원해주셨다. 그리고, 특강비는 보통 7대 3의 비율로 강사와 학원이 나누어 가졌는데, 다른 선생님들 몰래 나에게는 8대 2로 주기도 하고, 100프로 다 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내가 잘나서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두 사람이 가르치던 수업시간을 나 하나만 뽑아놓고 넘긴 것이었다.(후임으로 들어온 선생님이 어떻게 이걸 다 가르쳤냐고 연락 오기도 했었다. 내가 잘난 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선생님들이 내 시간표를 보며 언제 쉬냐고 걱정할 정도였다. 밥만 주면 8시간도 연속강의가 가능했으니 학원 입장에서는 득이었다. 이용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적어낸 월급도 받아들여졌고, 특강비도 알아서 더 주셔서 불만은 없었다. (결혼 후에 몸이 아파 그만두게 되었다.)


학원 강사로는 '고작' 꽉 채운 3년 근무지만

365일 중에 330일을 일했으니 참 열심히도 살았다. 지금의 20대는 나보다 더 치열한 삶을 살고 있다고 들었다. 누군가는 나 정도면 힘든 것도 아녔네, 그 정도면 꿀이지 라고 할지도 모른다.

 예전에 교수님께서 그러셨다. 중소기업에서 월급이 180만 원이라고 하면 다들 안 가려고 한다고. 그런데 20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일하고 받는 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집값은 그때보다 3배는 거뜬하게 올라있는데 말이다.

지금의 20대들이 치열하게 살면서도 자기 자신을 칭찬해 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마저도 모두 세상이 빼앗아 간 것 같아 속상하다. 치열하게 살았던 시간마저 소중해야 하는데, 잊고 싶은 시간만 늘어난다고 생각할까 봐 속상하다. 

그리고 꼰대 같지만, 사실은 중간에 껴서 힘들긴 힘든 우30,40대 있고, 20대를  응원하는 기성세대도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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