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학년에 반이 2개뿐인 지방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수도권으로 이사 온 뒤 5학년, 6학년 시절 나는 상을 쓸어 담았다. 글짓기, 표어, 포스터 분야를 가리지 않고, 월요일 운동장 전체 조회가 있을 때면 하루에 세 번도 불려 나가 상을 받아왔다. 뭐든 열심히 하기도 했고, 좋아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학창시절에 받은 내 이름이 쓰인 하얀색 두꺼운 종이는 300장 가까이 쌓였다.
하루는 하교 후에 집에 와보니 엄마는 나가고 없었고, 거실바닥에 빨간 글씨로 쓰인 무언가가 있었다.
엄마, 시장 다녀올게. 고구마 찐 거 식탁에 있으니까먹고, 학습지하고 있어.
엄마가 남긴 메모지를 뒤집었다.
내가 받은 상장중에 한 장이었다.
나는 무수히 많은 상장을 받는 동안, 단 한 번도 칭찬은커녕, 상장을 보고 웃는 엄마 얼굴도 보지 못했다.
받아쓰기 100점도, 상장도 대학교 장학금도 모두 엄마는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엄마는 7남매 중에 끝에서 세 번째 딸로 태어나, 공부가 하고 싶었지만 외삼촌들 때문에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일까? 내가 자라온 환경은 엄마가 견디기 싫었던 그때보다 훨씬 더 풍요로우니까.
덕분에 나는 물론 내 동생도 칭찬을 거의 듣지 못하고 컸다. 내 기억엔 '잘~한다'는 있어도, '잘했다~'는 없다.
밖에서 아무리 '너 대단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집에 가면 돌대가리에헛똑똑이였다.
그런 내가 성인이 되고 다짐했던 것이 있다.
아빠 같은 남자와는 절대 결혼하지 말 것
내 아이들에겐 절대 엄마처럼 하지 말 것
보고 배우는 게 무섭다고 나도 모르게 내가 겪은 정서적 허기를 아이들에게 되풀이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첫째 아이가 생기고 나서 육아서적이며, 오은영 박사님이 나오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싹 다 봤다.
열심히 했네~ 하기 싫었는데도 이렇게 해줘서 고마워~ 틀려도 괜찮으니까 좀 더 해보자. 모르는 건 혼 날일이 아니야.
호르몬의 노예가 되는 하루만 아니면 거의 저런 수준으로 아이에게 말했다.
속에서 천불이 나도 내가 들었던 말 들을 생각하며 꾹 참았다.
오늘 첫째가 원격수업을 하면서 그리기 과제가 있었다. 달리기 하는 모습을 그릴 건대 도와달라고 했다. 하기 싫어서 나에게 떠넘기려는 아들에게 팔은 니은, 다리는 기역처럼 그리면 된다고, 일단 먼저 그려보고 어려우면 도와주겠다고 돌려보냈다.
과제를 마치고 들고 온 그림의 수준은 형편없었다.
잘 그리는 6살의 그림 같았다. 사람은 늦둥이처럼 4등신으로 그렸고, 다리도 니은 모양으로 그렸다. 그래도 디테일은 있었다. 땀방울과 쌩쌩 달리는 꼬리표와 결승선. 그리고 색칠은 꼼꼼히 했다.
그리기 싫었는데 끝까지 그렸네 그거면 됐어~잘했어~
그림은 4학년 전체가 보는 게시판에 업로드를 한다. 다른 사람이 평가를 하든 안 하든 자신의 그림을 보게 되는터라 이미 시작 전부터 주눅 들어있었다. 그럼에도 망했다며 종이를 찢지 않고, 나름 열심히 완성한 것에 대해 칭찬을 해줬다. 아들은 그 말 한마디에 칭찬을 받았다며 하루 종일 신나 있었다.
참, 별거 아닌데.
엄마는 그게 왜 어려웠을까.
우리 아들은 '엄마 사랑해'를 하루에 열 번도 더한다. 나는 죽을 때까지 '엄마 사랑해'는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