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기둥 '둘째 수지'는 내가 낳았지만 참 신기한 아이이다. 수지가 2학년이 되고 나서, 내가 참 많이 귀찮게 했다. 3월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후, 엄마들이 수지네반은 분위기가 핑크빛이라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었다.
반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사이좋은 반이 있고, 적이 되어 싸우는 반이 있는데, 수지네반은 사랑이 샘솟는 반이었다. 처음에는 수지가 남자아이들에게 관심이 없는 편이라 나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어느 날 수지의 친구가 같은 반 남자아이에게 사귀자고 고백했다는 걸, 다른 엄마들을 통해 알게 되었고, 나는 그날부터 수지를 귀찮게 했다. 여자아이 치고 학교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니라서, 슬쩍 널 좋아하는 아이는 없느냐고 물었다.
"난 모르겠는데, 애들이 A가 날 좋아하는 것 같대. 그리고 B는 나를 계속 쳐다봐. C는 나랑 윤아를 좋아한대."
월척이었다.
"엄마 생각엔 B는 널 좋아하는 게 맞을 것 같은데. 근데 C는 뭐야 왜 둘을 한 번에 좋아한대? C는 안돼."
우리 수지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웃긴데, 학교 교문에 들어가기 전부터 마술에 걸린 것처럼 눈빛, 목소리 크기 손짓까지 모든 것이 변한다. 마치 남자들의 어린 시절 첫사랑 같은 이미지로 변신한다. 내가 낳았지만 참 신기하다. 그런 수지에게 홀딱 반한 아이가 셋이나 있었다니 괜히 내가 설레서 매일 수지가 빨리 집에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A는 나랑 같이 사는 남자보다 나았다. 항상 수지 주변에서 수지를 지켜줬다. 장난기 많은 아이가 준비물로 가져온 나무 포크로 장난을 할 때 A는 포크를 손으로 잡고 막아서며 수지를 구해줬다. 수지가 혼자 일찍 하교하는 날에는 하교 준비하는 수지 옆에서 가방을 들어줬고, 거의 매일 수지에게 작고 귀여운 선물을 줬다. 주로 반짝이거나 핑크색이거나 하트 모양인 물건들이었다. 여자들이 말하는 작고 반짝이는 것들을 어디서 들었던 것 일까. 정작 수지는 좋지도 싫지도 않았지만 나는 매우 엄청 좋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지는 내가 묻지 않아도 A에 대해 얘기해줬다. 엄마가 러브스토리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지 잘 아는 딸이다.
하루는 저녁이 다돼서야 가방에서 뭘 꺼내더니 설거지하고 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엄마 A가 반지 줬어"
반지라는 말에 문방구에서 반지를 샀나 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옆을 보니 A가 직접 접은 하트 반지였다.
문방구에서 여자 친구 준다고 엄마 졸라서 반지를 산다는 남자아이들 얘기는 예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던 터라 놀라울 게 없었다. 그런데 직접 접은 빨강 하트에 분홍 반지라니. 9살인데 왜 이렇게 내 가슴을 찡하게 하는지.
'어머 얘 진짜 뭐야. 요즘 이런 애도 있다니. 아빠가 로맨티시스트인가.'
반지는 딸이 받았는데, 고백은 내가 받은 것처럼 실실 웃으며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두 시간쯤 지났나. 수지가 다시 내게 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엄마, 근데 아까 그 반지 A도 손에 끼고 있었어."
'아, 이 시간차 공격. 커플링이라니.
딸아 왜 한 번에 말해주지 않은 거니.'
9살의 고백이 이리도 담백하고 순수하고 사랑스러운지.
그리고 얼마 후, 잠잠하던 B가 일을 냈다. 얼마 전, 반에서 목소리 크고 장난 좋아하는 아이가 'A가 수지를 좋아한다'라고 외쳤나 보다. 자극을 받았는지, 수지가 없는 동안 반 아이들에게 내일 수지에게 고백을 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단다.
수지는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너무나도 부끄럽다고. 울먹이는 수지에게 어떻게 답을 해줘야 하나 고민했다.
"B가 고백 안 할 수도 있고, 고백해서 부끄러우면 선생님한테 말하고 조퇴하자. 그래도 학교는 일단 가야 해."
학교에 안 가고 싶다고 울먹인 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가지 말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겨우 달래고 진정시켜서 학교는 가기로 했는데, 수지가 이렇게 물었다.
"엄마 근데 A는 왜 나한테 고백 안 해?"
A가 고백을 안 해서 별로라는 건지, 단지 궁금해서 그러는 건지 그건 알 수 없었다.
"수지야. A가 그동안 너한테 한 게 다 고백이야. 좋아해 사귀자 말만 안 한 거지 그동안 너한테 준 작고 반짝이는 것들이랑 너 옆에서 지켜준 거 생각해봐. 그게 다 너 좋아한다고 티 낸 거야."
수지는 고백하는 말이 중요한 거라 생각했나 보다.
거의 매일을 좋아한다고 티 내고 있었는데, 내 딸은 지고지순한 사랑 타입은 아니었나 보다.나쁜 남자는 안되는데..
그 뒤로도 A는 한결같이 수지 곁에 있었다.
"엄마 5교시에 코피가 나서 보건실에 갔는데, 나는 처음 가서 몰랐는데 실내화 벗고 들어가는 거래. A가 말해줘서 알았어."
"A가 말해줬다고?"
"응 같이 갔거든."
"왜? 보건실 어디 있는지 몰라서?"
"아니, A가 발목에 모기 물린 거 간지럽대서 같이 갔어."
모기 물린 건 사실이었지만, 간지러웠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A의 짝사랑을 선생님께서도 알고 계신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