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닌데?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지만 축복받는 탄생은 선택할 수 있다.
나 때문에, 내가 생기는 바람에 결혼을 하게 됐다는 엄마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가 불행의 씨앗인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나 싶었다.
몇 해 전, 해외에서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건 청년이 있었다. 그는 자신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니 성인이 되고도 한참이 지난 본인을, 부모가 부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구나.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삶이 힘든 것도 내 몫이니 소송을 거는 건가 싶었다. (뒤늦게 찾아보니 패소했다.)
현실에서는 '나는 내가 선택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살아야 해?'라는 질문조차 하기 어렵다. 생명은 너무나도 소중하고,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대단한 것이며, 지금 이 순간도 어느 별은 밝게 빛나고 싶지만 지고 있을 테니까. 저런 질문을 입밖에 낸다는 것이 그동안 참 어려웠다.
첫째 아들이 7살 때, 나에게 말했다.
"나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야."
역시 내가 낳았구나.
다른 아이들 같으면, 엄마는 나를 왜 낳았어? 어떻게 낳았어?라고 말할 텐데.
나는 엄마도 너처럼 생각한 적이 있다며, 우울한 얘기를 할 뻔했지만, 불만 가득한 아이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지, 네가 나오고 싶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건 아니지. 엄마가 아들이 갖고 싶어서 그랬어."
"그랬어? 왜 갖고 싶었는데?"
"아들이 뭔가 듬직할 거 같았거든."
"근데 나는 약하고 자주 아프잖아."
"그건 엄마가 몸이 안 좋을 때 임신해서 그래. 그때 엄마가 항생제를 많이 먹었는데, 몸이 건강해지고 임신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아. 네 잘못 아니야. 그래서 엄마는 항상 미안해."
아마도 다른 아이들보다 자주 잔병치레를 했던 탓에 자신도 불만이 많았던 것 같았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튼튼하지도 않은 것이 불만이었나 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사춘기 예고편인 9살 시절. 아들은 또 말했다. 전보다 더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거든, 근데 너무 힘들어."
뭐가 그리도 힘들었는지, 또 그 소리를 했다.
아마도 구구단 수학 문제집을 풀 때였나 보다.
참, 별일도 아닌데 삶을 얘기하는 것이 꼭 나 같다.
"그렇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니지. 근데 엄마는 널 낳았기 때문에 네가 그래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 옳은 것 옳지 않은 것 잘 가르쳐 줘야 하고, 해야 하는 것이 뭔지 알려 줘야 하고. 그런 게 엄마가 해야 하는 일이야."
그 뒤로는 2년 동안 한 번도 저 얘길 꺼내지 않았다.
첫째는 얼마 전부터 변성기가 오고, 뺨과 콧등은 피지가 쌓이고, 머리에는 각질이 일어났다. 키만 큰 게 아니었다.
첫째가 둘째랑 레고를 가지고 놀다가 하는 이야기를 남편이 어렴풋이 들었나 보다.
"너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 알아?"
"남자에서 나오는 난자랑 그런 거?"
"남자한테 있는 건 정자지 난자가 아니고."
"남자니까 난자 아니야?"
Ebs를 그렇게 봤는데도 난자인지, 정자인지 둘째는 관심이 없다. 남편에게 얘기를 전해 듣고, 아들에게 가서 아이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아느냐 물었다.
"남자 몸에서 정자를 주사기로 빼서 여자한테 넣는 거 아니야?"
6살에 성교육 뮤지컬을 대학로에 가서 보여주고, ebs에서도 여러 번 나왔지만. 정작 나도 배운 적 없는 그 부분은 어느 곳에서도 알려주지 않았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스마트폰이 있는 친구들이 친절하게 맛 보여줬으려나.
일단, 성교육 상식사전이라는 책을 주문했다. 이제는 적나라하게 모두 다 알려주어야 하는 때가 온 것 같다. 잘못된 판타지를 먼저 보는 것보다야 훨씬 낫겠지 생각하며, 열심히 알려주려고 한다. 본능을 다스리지 못하면 아무리 잘난 인생이라도 어떻게 끝나는지 까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니지만,
나는 내 아들을 잘 키우고 싶다.
바. 르.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