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몽튤립

나를 알아봐준 사람

by 에토프

홍대입구역 출구로 빠져나와 두리번두리번 그를 찾고 있었다. 저 멀리서 그가 나에게 손을 흔들고는, 목을 까딱인다.


오늘은 원피스를 입지 않았다. 하얀색 티에 블랙에 가까운 네이비 재킷, 발목이 살짝 보이는 세미 부츠컷에 새빨간 플랫을 신었다. 원피스를 입으면 내 마음을 또 들킬 것 같았다.


"하연 씨 오랜만이에요. 멀리서도 딱 알아보겠던대요?"


6개월을 보지 못했는데도 그는 나를 단번에 알아봐 주었다. 수업시간에는 두 분단을 건너 앉아 있던 터라 그의 피지컬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가까이서 그를 마주 보니 또 심장이 두근댔다. 내 눈이 그의 쇄골쯤에, 그의 입술이 내 이마쯤. 어깨도 넓고, 목소리도 참 좋았다.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


"하연 씨? 차부터 마실까요? 커피 좋아하세요?"


너무 빤히 보고 있었는지, 그 사람이 눈을 크게 뜨고 말을 걸었다. 아, 3초. 3초 동안 우리는 눈을 마주쳤다.


"아 죄송해요. 가까이에서는 동욱 씨를 처음 봐서요. 저 커피 좋아해요."


그는 자기가 알아봐 둔 곳이 있다며, 길을 안내했다.

토요일이라 사람이 워낙 많았다. 우리 사이는 어색했지만, 붙어서 걷지 않을 수 없었다. 재빠르게 지나가는 오토바이에 닿을까 그는 나를 열심히 보호했다. 그의 손이 팔에 닿을 때마다 얼굴이 빨개지지는 않았을까 걱정되었다. 연애를 너무 오래 쉬었나.


그와 도착한 곳은 꽤 넓고 층고가 높은 곳이었다. 3시가 넘어가는데도 햇살이 참 예쁘게 들었다.

우리는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플랫화이트와 아메리카노를 가지고 와 자리에 앉았다.


"쪽지 받고 좀 놀랐어요."


"아, 그러셨군요. 빨리 고백하고 싶었는데, 계속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서. 그러지 못했어요."


"제가 너무 힘든 티를 많이 냈죠?"


"저는 하연 씨를 수업시간에 보기만 했잖아요. 당차고 멋졌거든요. 프레젠테이션도 그렇고. 근데 일기 보고 나니까 많이 여리시다는 생각도 들고. 그냥 옆에 있어주고 싶었어요. 깊은 사이가 되지 못하더라도. 힘들어하는 게 저도 마음이 아팠거든요."


"근데요... 저는 솔직히 수업시간에 봤던 동욱 씨 모습이 별로였거든요. 매번 질문을 너무 쏘아대듯이 하시니까... 그건 왜 그러신 거예요?"


"아, 제가 그랬나요? 욕심이 앞섰나 봐요. 하연 씨한테 잘 보이고 싶었던 것도 조금 있고요. 근데 별로였다니. 제가 다른 수업에도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이라 못 느꼈나 봐요. 저 점수 깎인 거죠?"


"아뇨, 뭐 아직 만난 지 30분도 안됐는걸요. 그런데.. 다 보셨잖아요. 제 전 남자 친구를. 저는 그게 좀 걸리네요."


아 실수였다. 그냥 밥 한번 먹자고 하고는 전 남자 친구가 마음에 걸릴만한 이유도 없는데 나는 헛소리를 했다.


"하연 씨 되게 매력 넘치는 거 알아요? 새침하고 도도해 보이는데, 엄청 솔직하고, 여리고. 그리고 재밌어요."


들켰다. 가장 친한 사람들한테만 보이는 푼수 짓을.


"제가 좀 오버했죠? 아직 그래요. 갈 길을 못 찾고 헤매는 느낌이에요. 울다가 웃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러네요. 그래서 만나기가 망설여지긴 했는데, 나오길 잘한 것 같아요. 그때 봤던 동욱 씨가 다는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간단하게 맥주와 안주를 즐길만한 곳을 찾아 나섰다. 노을이 지고, 바람이 시원했다. 홍대 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붐볐고, 나는 오랜만에 사람들 사이에 섞여있는 내가 행복해서 좋았다. 그와 맥주를 마시며, 호칭 정리를 하고, 소개팅 때 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을 하느라 학교에서 보기 힘들었던 것도, 서로의 취미, 취향, 혈액형, 형제관계.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모두 나왔다. 동욱 씨는 오빠가 되어 있었고, 나는 오랜만에 시간이 가는 것이 아쉬웠다. 10시가 돼서야 우리는 일어났고, 역으로 가던 길에 그는 나를 잠시 기다리게 하더니, 자몽 튤립을 들고 나타났다.


"이거. 너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었다. 자몽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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