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의 나

썸썸썸

by 에토프

내가 먼저 열차에서 내리고, 그가 탄 열차의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나서도 나는 가만히 그곳에 서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몽튤립을 들고.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이었다. 내가 숨 쉬고, 살고 있구나. 이제 다른 사람을 만나도 되겠구나. 기쁜데 눈물이 났다.


집에 돌아와 씻고 나니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잘 들어갔지? 집까지 데려다주는 게 맞는 거였나 싶네... 나는 더 기다릴 수 있으니까, 언제든지 연락 줘. 잘 자-


그의 표현은 부담스럽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선을 참 잘 지켰다. 내가 생각이 많아질 거라는 것도 알았던 걸까. 재촉하지도 않았다.

일주일이 지났고, 또 토요일이 됐다. 나가고 싶었지만 엉덩이가 떼지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


오빠. 산책 갈래요?


나 마침 공원에서 농구하고 있었는데, 준비하고 나와~


그는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그가 사는 동네와 우리 동네 딱 중간지점에서 농구를 하고 있었나 보다. 대충 머리를 묶고, 편한 옷차림으로 나갔다. 노을을 보면서 맥주나 한 캔 마시고 싶었다. 혼자는 싫었다.


"나 너무 막 입고 나왔죠?"


"뭐 나는 땀범벅 인대?"


"맥주 마실래요?"


우리는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를 사고 계단에 앉았다.


"너 흑맥도 마셔?"


"가끔요. 커피도 그날그날 마시고 싶은 게 다른 거랑 비슷해요. 이거랑 요 머스터드 프레첼이랑 되게 잘 어울려요."


그는, 아니 오빠는 나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한 모금을 먼저 내어주었다. 그리고는 딱딱한 프레첼도 맛본 오빠는 깜짝 놀랐다.


"오, 진짜. 엄청나."


오빠는 벌떡 일어나 흑맥주를 더 산다고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뒷모습도 멋졌다. 내 첫 남자 친구는 뛰는 모습이 참 볼품없었는데, 농구를 해서 그런지 원래 뭘 해도 멋있는 건지. 내가 저 사람에게 푹 빠져서 그런 건지, 참 멋있었다.


"나 쌩얼인데. 기분 나쁘지는 않죠?"


"그게 왜? 아. 너무 성의 없이 나온 것 같아서? 두 번째 만나는 건데?"


"내가 남자였으면 그럴 것 같아서. 여자가 두 번째 만남부터 쌩얼로 나오면 나를 남자로 생각 안 하나보다 그럴 수도 있잖아요."


"남자로 생각 안 해서 그러고 나온 거야?"


"아니죠. 그냥 귀찮아서. 나가고는 싶은데, 꾸밀힘도 없어서."


"괜찮아, 어두워서 티 안 나. 그리고 여기 조명이 주황빛이라 예뻐 보이기만 해."


"아. 이 조명에서 사진 찍으면 잘 나오기는 해요. 다행이다. 있잖아요... 내가 오빠를 맘 편할 때까지 이용하기만 하고... 그래도 상관없어요?"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게 한쪽 작대기 가지고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묻는 게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일 텐데?"


오빠는 나를 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에 대해 이렇고 저렇고 알려주지 않아도, 소통이 잘됐다.


"다음 주에 놀이공원 갈래?"


"그래요."


우리 사이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나는 분명히 오빠가 좋았다. 놀이공원에 가는 날. 나는 무척이나 들떴다. 남자 친구가 생기면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예전 남자 친구들은 줄 서서 기다리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놀이공원에 가자고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 내게 오빠는 먼저 놀이공원을 얘기했다. 우리는 머리띠를 사고, 커플인 것처럼 여기저기 누비고 다녔다. 오빠는 예쁘다 예쁘다 하며, 사진을 계속 찍어줬다. 내 사진을 마음에 들게 찍어준 사람도 오빠가 처음이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나는 사진을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좋아한다는 걸. 오빠는 만날 때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깨닫게 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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