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are you do for living?
What are you do for living?
미국에선 주로 직업을 이렇게 묻는다. 직관적으로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사느냐?
보통 What is your job?이라는 말보단 보편적으로 쓰인다.
미국 같은 경우 특정 전문직 아니고서는 한두 개의 잡과 파트타임으로 생활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처럼 빠르게 변화되고 수명이 길어진 요즘 평생에서 몇 번의 직업을 경험하는 일은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서너 살 위의 선배들만 해도 대부분 삼성 같은 대기업에 입사해서 평생을 몸 바쳐서 60에
은퇴하자가 대부분의 인생 목표이자 삶의 맵이었을 것이다.
런던 유학시절 유로저널이라는 신문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인쇄 때문에 자주 독일에 가게 되었다.
그 시절 독일의 교육은 마이스터 교육이라고 10살이 되면 인생이 방향이 결정지어지는 전통적인 교육 시스템
에서 점차 다양성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을 때였다.
기존의 교육시스템은 아이가 초등학교 때 이과 문과 예술 계통, 스포츠 등, 몇 개의 카테고리에 묶여 평생을
최고 반열인 마이스터를 목표로 달려가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다 중도에 탈락이라도 하게 되면 다시 사회의 구성원이 돌아가기가 쉽지 않은 구조였다.
그러다 보니 영어를 하는 사람이 드물었었다. 자기 분야 외는 관심조차 없어서 다른 분야에 대해 서로가
너무 모르는 경우가 많았었다. 당시 세계의 축소판인 다양성의 도시 런던에서 지내던 나에겐 큰 충격이기도 했다.
하나의 직업으로 평생을 산다는 것에,,
지금껏 살면서 나는 몇 개의 직업을 경험했을까?
잡이 아닌 경험의 측면에서 보니 꽤 많은 편이다. 경험의 기간 동안 돈을 받고 그 돈으로 먹고살았으니
직업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신문 배달 1달 (아마 시장 골목 안에 있는 권투 도장에 다니려고 했던 거 같다)
중학교 3학년 (복조리 장사. 이건 사실상 첫 사업 경험이었다)
이모부께서 지인에게 못 받은 돈이 있으셔서 주변에 인상만 더러운 친구들 몇 명이랑 같이 돈 받으러 따라간 적이 있었는데
그 채무자가 그 당시 비닐하우스 안에서 대학생 아르바이트생들 여러 명이랑 복조리를 만들어서 판매를 하던 모습에,
그 비즈니스 구조와 수익성에 놀랐었다.
먼저 복조리 재료( 복조리, 리본, 비단 주머니 )를 남대문 시장에서 사서 복조리 2개를 리본과 주머니를 함께 x 자로 묶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000 대학생 드림.라고 적힌 포스트잇만 한 메모지와 함께 12,31일 새벽에 집집 대문에 걸고 다음날 오전에 수금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원가가 350원 정도인데 공식 판매가는 2000원이었으니 마진율이 엄청난 것이다.
중3 연합고사가 끝나고 한창 무료한 겨울을 시작하고 있을 무렵 주변 친구들은 알바를 하기도 했다.
대부분, 동네 있는 경양식집에서 서빙이나 설거지 정도였었다.
아르바이트비로 번 돈을 동대문시장에 가서 3만 원 정도 하는 조끼가 있는 3피스 싸구려
정장 한 벌씩 사는 게 우리에겐 작은 로망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사업 설명을 하고 얼마를 빌려주면 이자를 얼마 쳐서 갚겠다는 일종의 사업 계획서를 보여주고
5만 원을 빌렸다. 그리고 3명의 친구들에게 4일만 일하면 각 5만 원씩 주기로 하고 인생의 첫 사업을 시작했다.
남대문에 가서 복조리와 리본을 사고 한방을 쓰던 여동생을 아끼던 마이마이와 이선희 테이프를 주는 조건으로 안방으로 밀어내고 복조리를 조립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업에선 항상 변수와 리스크는 존재하는 법.
싸구려 가위론 복조리를 다듬기가 힘들었다. 손에 물집도 잡히고 결국 각자 집으로 가서 주방용 가위부터 모든 가위들을 가져와서 2일 밤을 새우고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다음은 어느 지역에 돌릴 것인가?
새로 사귄 여차친구와 세 번째쯤 만날만한 설레는 맘으로 한 바구니 가득 들고 새벽에 길을 나섰다.
하나 이미 집집마다 걸려있는 복조리들...
한참을 헤매다 보니 어떤 형들이 이 구역은 자기네 구역이라면서 험악한 분위기로 우리에게 나가라고 한다.
우리는 한참의 고민과 회의 후 버스를 타고 학교 앞의 고층 아파트 단지로 갔다.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 주변엔 몇 개의 고급 아파트들이 있었다.
역시나 입구에서 경비 아저씨들 제지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바카스와 당시 최고 비싼 솔 담배를 사서
한 갑씩 드리고 사정을 해서 경우 들어갈 수 있었다.
아마 어린 우리를 불쌍하게 보셨을 것이다. 그렇게 무사히 첫 배송을 마치고 자축을 했다.
다음날 설레는 맘으로 집집마다 초인종을 눌러서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수금을 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단 판매율이 높진 않았지만 깜빡하고 가격 표시를 안 한 것이 전체적으로 매출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보통 시세가 2000원인데 어린 친구들이 하니 보통 3-4천 원, 어떤 분들은 5천 원도 주시기도 했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살던 오금동은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였었는데 문정동, 가락동은 대부분 아파트라
중산층 이상의 분들이 많이 살던 동네였었다.
그렇게 40% 재고가 남았으나, 목표 매출은 이미 달성하고 같이한 친구들에게 약속한 5만 원+ 보너스 1만 원씩
더 주었다. 아버지에게도 빌린 돈을 드리고 이자는 안 받으셨다.
2월이 되니 구정이 있어서 한 번의 추가 매출이 더 있었다.
이번엔 노하우도 생겨서 동정심을 유발할 만한 인사멘트까지 연습해서 수금을 했다.
그러나 담배 받으신 경비 아저씨가 소문을 내셨는지 담뱃값이 많이 들어서 영업 이익이 신정 때처럼 높진 않았다.
나는 이 경험으로 돈을 벌기도 했지만 사회라는 정글의 입구에 살짝 발을 담가본 거 같았다.
예상대로 되지 않는 상황들.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 결정을 해야 할 순간의 고민,
일이 잘 끝난 후 오는 성취감 속에 감춰진 공허감,,,
아마 이때 처음 담배를 배우기 시작했던 거 같다.
어른들이 담배연기 속에 어떤 의미를 태워버리고 싶었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이후로 나는 살면서 새로운 일을 하는데 두려움이나 어색함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롯데리아 / 새 차 아르바이트 / 고깃집 / 맥줏집 / 가구점 배달 / 룸살롱 웨이터 / 나라시 운전 / 여행 가이드 /
이삿짐센터 / 레스토랑 / la에선 옷 가게까지,,, 등등
돌아보니 참 다양하게도 경험해 본 거 같다.
디자인이라는 조강지처 전공을 버리고 30대에 시작한 이 일이 아직도 나에겐 성장 중이다.
지금은 촬영보단 운영의 포션이 커지긴 했지만, 아직도 촬영 전에는 설렘이 있다.
흡사 아껴둔 와인을 오픈하기 전 같은,,,
나는 항상 촬영 전날 밤 꿈속에서 촬영 일을 하루 앞서서 시뮬레이션하는 꿈을 꾼다.
정확히 말하면 꿈이 아니고 밤새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촬영하다가 생길 수 있는 모든 변수에 대해 미리 경험을 하는 내 나름의 오랜 노하우이다.
예를 들면 장비 문제, 모델 컨디션, 광고주 성향, 점심 식사 메뉴, 주차 등 사소한 거까지 확인하고 해결하여
촬영일 잠을 못 자 피곤하긴 해도 대부분 변수에 대해 준비를 해놓은 상태라 큰 문제없이 잘 마치게 되는 편이다.
그래도 변수는 생긴다.
올해부터는 되도록 카메라를 많이 들려고 한다. 작은 부분까지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포토그래퍼라는 예민한 친구들과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