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안된 철없는 유학생
얼마 전 우연하게 나랑 비슷한 같은 나이에 같은 시기에 런던에서 공부를 했다는 분을 만났다.
1999년 당시에는 나라가 imf 사태후 후폭풍이 몰아치던 힘겨운 시기였었다.
해외로 나갔던 유학생들은 높은 환율에 공부를 포기하고 다시 귀국길에 오르던 우울한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무슨 깡이었는지 아님,, 호기심이 현실을 이기고 영국으로 향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가난한 유학생의 길은 험난하고 힘들었었다.
그러기에 많은 아르바이트도 경험했었다.
영어가 하나도 안되던 랭귀지스쿨시절에는 새벽 세차알바를 나갔는데 집에서 한 시간이나 걸리는 곳의
한 비즈니스 빌딩 지하에서 세차를 하는 일이었는데., 당연히 나에게 배정된 세차량은 많지 않았다.
새벽에 그 먼 곳까지 가서 3-4대 정도만 세차하고 오니 현타가 제대로 왔었다.
한 번은 너무 열심히 세차를 해선지 입고 티셔츠한부분이 찢어진 것도 모르고 오는 버스 안에서 알게 되었다.
한국서부터 얼마나 아끼던 엠포리 알마니 티셔츠였는데...
온갖 짜증과 우울함이 몰려올 때쯤 같이 간 동생이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중고 옷가게에서 티셔츠를 사주며
형은 아직 준비가 안된 거 같다고 말한 기억이 떠오른다..
내 나이 30에 어린 친구들이랑 공부하면서 들은 가장 창피한 말이었다.
이후 나는 열심히 알바를 하면서 공부도 하고.. 좀 더 가성비 좋은 알바를 찾게 되었다.
당시 영국엔 영국생활이라는 교민 신문이 있었다.
주재원 아이들 특례입학 전문 학원을 하는 원장님이 신문사를 같이 운영하고 있었다.
신문은 기사도 있지만 대부분 로컬 스토어나 대한항공. 식당. 슈퍼등의 광고를 받아서 운영하는 구조였었다.
나에게 광고 만드는 일은 디자인 전공에 실무 업무도 하던 디자이너였으니 그다지 어려운 일들은 아니었다.
얼마 후 사장이 한국서 투자이민온 분에게 영국생활 신문사를 팔게 되었다.
다른 직원들은 다른 사장 밑으로 들어갔으나 나에겐 다른 신문을 준비 중이라고 같이 일하자는 제의가
와서 다시 전사장과 합류하게 되었다.
새로운 비즈니는 기존의 영국생활은 영국뉴스만 다루니 유로저널이란
유럽전역에 나가는 신문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사장님 성함이 김훈이라는 분인데 유럽한인회 부회장에 이것저것 명예욕이 많으신 분이었다.
사업 수완이 엄청 뛰어나셔서 영국생활 판돈으로 독일에 신문사를 매입해 인쇄를 독일에서 하려고
준비 중인 상황이었다.
당시 영국은 전 세계에서 최고 물가에 인쇄비도 엄청 비싸서 운영이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첨엔 광고파트만 맡아서 작업을 하다가 점점 사회면까지 작업하게 되었다.
당시는 여성지에 나오는 연예인 사진을 스켄해서 마구 식당, 술집광고들에 사용할 때였다.
그러다가 한 여가수가 대사관 초청행사로 런던에 왔다가 자기 얼굴이 실린
가라오케 광고를 보고 기겁해서 난리가 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 이후 초상권을 함부로 사용을 할 수 없게 되니, 대부분 택스트만 잔뜩 들어간 광고밖에 만들 수가 없었다.
나는 사장님에게 디지털 카메라를 사달라고 해서 직접 광고 사진 등을 촬영해 디자인을 해서 차별화를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PDF 파일을 제작해 독일로 보내 풀칼라 인쇄를 시작하기도 했다.
등등 많은 부분이 나로 인해 다른 신문사에 비해 월등하게 차별화되어 앞서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월급을 더 주거나 하는 사장님은 아니었다. 100일 된 딸아이 유모차를 옆에 두고 일할 수
있게 해주는 정도만 해도 고마운 일이었다.
당시엔 한인타운 뉴몰든에서 송가네 슈퍼라는 곳이 제법 큰 슈퍼였었다.
슈퍼에선 비디오 대여사업도 같이 하고 있었는데 당시 한국서 유행하던 드라마들 뉴스들을
불법 카피하여 대여해 주고 돈을 받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시절이지만 2000년 당시에는
먼 타국에서 가끔 보는 한국 드라마나 쇼프로는 정말 소주 한잔 생각나는 것이다.
가끔 가보면 인기 있는 프로들은 다 대여가 나가고 없어서 실망한 적도 종종 있었다.
나는 비디오 가게 사장님께 사회 문화면에 기사광고를 해주기로 약속하고 새로운 드라마나 쇼프로가
오면 젤 먼저 받아보고 기사화했다.
예를 들면 예고편 같은 내용의 기사를 실어서 호기심을 주는 방식이다.
덕분에 외롭지 않던 유학생활을 보냈던 거 같다.
보통 교민신문 마지막 장은 명함사이즈만 한 박스 광고로 가득 채운다.
대부분 단기 광고, 민박집, 택시, 사람 찾기, 개인교습등의 광고 들이다.
나도 당시에는 사이드 잡으로 택시(미니캡)이라는 지금의 우버 운전 알바를 했었다.
그리고 포토샵개인교습 및 사진학교 입학 포폴작업등, 웨딩, 백일, 돌, 사진 촬영등 3-4가지 일들을
동시에 하던 시절이라 광고박스사이즈를 조금씩 줄여서 내 광고들은 넣곤 했다.
물론 광고비를 안 내고 몰래했었다. 나름 안 들키려고 디자인도 바꾸고 위치도 바꿨었다.
나중에 사장님이 다 알고 있었다면서 열심히 사는 거 같아 그냥 두었다고 하셨다.
한 번은 유로저널이 유명해진 사건이 있었다.
911 테러가 났을 때였다. 신문에 전면 기사로 작업 중이었는데 건물이 무너지는 사진들이
임팩트가 없어서 포토샵으로 더 과장되게 작업을 해서 나간 적이 있었다.
다른 신문사에서 사진 어디서 구했냐며 연락들이 엄청 왔었다.
그일 이후 런던 교민 신문업계에선 스카우트 제의가 종종 오기도 했었다.
그래도 유로저널 특성상 매달 독일 본에 있는 신문사도 가보게 되고,
다른 유럽국가들도 종종 가는 일이 있어서 그 재미에 유로저널 남아 있었다.
점점 유로저널에서 나의 롤이 많아지고 중요해져 갔었다.
나중엔 내차로 런던전역에 신문 배달까지 했으니..
그 덕에 런던 지리는 손바닥 안에 있었다. 25년이 지난 지금 가서 운전해도 기억이 날 거 같다
정말 가끔 유로저널사이트에 들어가 보곤 했다.
내 흔적들이 있는 걸 보면 그때의 향수가 느껴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