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TV에서 건축학 개론이 방영되었다.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눈에 들어와
보기 시작했다.
내용은 사람들은 다 아는 내용이겠지만, 풋풋한 대학 시절에 만난 남녀가 서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졸업 후 각자의 삶 속에서 우연히 재회하는 이야기다.
그렇고 그런 멜로물이라지만, 이상하게도 다시 볼 때마다 감정이 달라진다.
처음엔 주인공 서연과 승민의 첫사랑과 엇갈림에 집중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들이 아니라,
그 시절의 배경, 문화, 패션, 그리고 음악이 나를 더욱 깊은 곳으로 데려갔다.
납득이의 대사 하나하나가 그때의 나와 친구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재수하던 내 모습도.
당연 수지와 한가인의 빛나는 미모도 영화 내내 큰 역할을 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서연과 승민의 풋풋한 첫사랑에 집중했다.
그 어색한 감정, 서툰 표현들, 그리고 엇갈림.
젊은 시절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이야기라 공감하며 봤다.
하지만 다시 보니, 단순한 첫사랑 영화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한 번쯤 잊힌 첫사랑을 언젠가 우연히 다시 만나기를 꿈꿔보곤 한다.
나 역시 군대시절 헤어진 첫사랑을 한 번도 다시 만나적이 없다.
각자 서로 다른 지역에서 다르게 살다 보니 더욱더 만날 일도, 가능성도 전혀 없었을 것이다.
30대 초반, 런던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시절이었다.
향수병이 찾아올 때면 술 한 잔 걸치고 한국에 있는 친구나 선배들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어느 날, 유일하게 그녀의 소식을 알던 선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 이번 달에 결혼한대."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헤어진 후엔 항상 치기 어린 마음에 ‘나중에 성공해서 꼭
그녀 결혼식 날 멋지게 나타나 축의금을 두둑하게 내야겠다’는 유치한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때의 나는 가난하고 힘겨운 유학생이었다.
선배에게 부탁했다. “내 이름으로 100만 원만 대신 전달해 줄 수 있어?” 선배는 아무 질문도 없이 그저 알겠다고 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선배에게 돈을 갚겠다고 하자 그는 뜻밖의 말을 했다.
"너 감정적일 때 한 결정이었잖아.
그녀가 불편해할 수도 있고,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 안 했어."
그 순간 깨달았다.
선배는 내 미래의 후회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돌아보니 너무 고마운 선배였던 것이다...
그녀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는 소식을 들은 건 40대 초반이었다.
시애틀에서 패밀리 레스토랑을 운영한다고 했다.
마침 캐나다 출장을 마치고 미국으로 가는 길,
문득 생각이 나 그녀의 레스토랑을 찾아보았다.
호텔에서 한인 신문을 뒤적이며 주소를 확인한 후,
충동적으로 택시를 잡아탔다.
10분 남짓한 거리였지만, 머릿속에 스쳐가는 기억들은 1시간쯤 되는 것 같았다.
레스토랑에 도착하자마자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다.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메뉴를 들춰보는데, 잠시 후 그녀가 다가왔다.
“주문하시겠어요?”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았다. 그녀는 아직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 목소리를 듣고 멈칫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너?”
나는 말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어떻게 여기에...” 짧게 묻곤 사라졌다.
그 후 그녀의 모습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는데, 그녀가 급히 따라 나오며 물었다. “언제 한국 가?”
내 손에 연락처를 쥐여주고, 꼭 다시 보자고 했다.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택시를 타고, 반쯤 열린 창으로 그녀가 준 연락처를 날려 보냈다.
그 기억이 이대로가 가장 아름다울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에 살면서 아주아주 가끔 생각이 나곤 했다.
잘살고 있겠지. 아이들은 몇일까? 지금은 어느 도시에 있을까?
la에서 어쩌면 마주치지 않을까?
아니면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했다.
또다시 50이 넘는 지금 그녀가 궁금하긴 하다.
50대가 되면 알게 된다.
첫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사람 때문만이 아니라,
그때의 우리가 가장 빛나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