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부터 미국에서 온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사진 특강을 들으러 온 학생, 대학 동창, 아내의 전 직장 동료, 내 전 회사 동료까지.
마치 어디선가 “한국 여행 추천 리스트”라도 공유된 듯한 느낌이었다.
생각해 보면, 미국에서는 이 시기가 긴 휴가를 보내기에 최적의 시즌이다.
핼러윈 → 블랙프라이데이 → 크리스마스 → 새해
이쯤 되면 한 달 내내 들떠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나도 괜히 들뜬 기분이 되어 손님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반가운 손님은 대학 동창이었다.
그 친구가 한국을 방문하는 건 5년 만이었다.
뉴욕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친구, 미국 생활만 30년째.
솔직히 이제는 한국 사람이 아니라 뉴욕 사람이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의 뉴욕행은 한순간의 선택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는 각자의 회사에 취업했다.
그는 그래픽 디자인 회사에서 일했다.
대부분의 초년생이 그렇듯, 야근과 밤샘이 일상이던 시절.
그런데 어느 날, 프로젝트를 끝내고 회사 사람들과 나이트클럽에 갔다.
그곳에서 그는 한 여자를 만났다.
우연한 부킹. 별 기대 없이 마주 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강렬하게 끌렸다.
문제는 그녀가 미국 유학생이었다는 점이다.
방학이 끝나자 그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는 그녀를 잊지 못한 채 뉴욕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너무나도 단순하고, 비현실적인 이유 같지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시기는 인생에서 그리 많지 않다.
그렇게 도착한 뉴욕.
하지만, 그녀와의 관계는 예상보다 빨리 끝나버렸다.
그리고 그는 미국에서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비자는 만료됐고,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도 없었다.
낯선 도시에서, 불안한 신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다.
아마 그 시간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말이 없는 그 친구조차 쉽게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던 중, 그는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그리고 결혼을 하면서 시민권까지 획득했다.
그의 뉴욕 생활은 비극에서 시작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모든 과정이 몇 줄로 정리될 만큼 간단하지는 않겠지만,
그는 결국 뉴욕에서 자기 자리를 찾았다.
그가 한국을 떠난 지 10년 만에 결혼식이 있었다.
전라도 광주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해서, 나도 먼 길을 달려갔다.
그때 이미 그는 뉴욕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건 2016년, 뉴욕에서였다.
그때의 그는 편안하고 안정적인 교민 사업가처럼 보였다.
우리는 몇 번 만나 밥도 먹고, 맥주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내가 캘리포니아로 이사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미국에서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만난 건 8년 만이었다.
이번엔 그가 다니던 회사를 나오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마침 묵고 있는 호텔이 우리 집 근처였는데,
그 호텔이 꽤 비싼 곳이어서 나는 괜히 그가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됐다.
몇 번 만나 술을 마시고,
우리는 서로의 인생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고, 담담했지만,
이제는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안정된 모습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만남이 더 소중해진다.
어떤 자리를 함께하는지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준다.
건강하고, 안정적이고, 편안한 사람들과 함께할 때
그 시간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삶의 일부가 된다.
그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까.
뉴욕에서? 서울에서? 아니면 또 다른 어디에서?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언제 어디서든, 그는 건강하고 행복할 것이다.
그게 내 친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