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띠 아저씨들의 놀이터
2025년 1월, 나는 서울 강동구 성내동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작년 초, 18년간의 하남 생활을 마무리하고 이곳으로 터를 잡았다.
하지만 강동구는 나에게 새로운 곳이 아니다.
바로 옆 송파구에서 중학교부터 대학교, 사회생활까지 15년 넘게 살아왔으니,
그냥 옆 동네로 이사 온 기분이다.
요즘 스튜디오 일도 바쁘지만, 부동산 시세를 알아보느라 당근 마켓을 뒤적이다가 흥미로운 문구를 발견했다.
"전철역에서 5분 거리, 주변 혐오시설 없음!" 문득 '혐오시설'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도대체 혐오시설이 뭘까?
원자력 발전소도 아니고, 교도소도 아닌데?
그러고 보니, 중학생 시절 다니던 학교 뒤편에 구치소가 있었고,
바로 옆에는 전두환 정권 시절 여당이었던 민정당 연수원도 자리하고 있었다.
가끔 대학생들이 연수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면,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며 해산시켰다.
덕분에 우리는 수업을 일찍 끝내고 집으로 가곤 했다.
그런 송파구가 이제 서울 3대 부촌 중 하나라니, 세월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송파구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낙후된 동네였다.
사실 행정구역 상 '송파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을 거치면서 잠실을 중심으로 문화와 체육 인프라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그제야 지금의 송파구가 형성된 것이다.
반면, 강동구는 오래된 동네답게 변화의 속도가 느리다. 하지만 큰길을 건너면 최근 입주를 시작한
15,000세대 규모의 초대형 아파트 단지가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각종 위기설로 뉴스에 오르내리던 곳이었는데,
결국 준공되어 입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분양가 대비 거의 두 배 가까운 가격 상승으로
입주민들에게 예상치 못한 선물을 안겨주었다.
바깥에서 보면 이런 상황이 부동산 투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조합원들의 심정을 백분 이해한다.
왜냐하면, 나 역시 1999년 조합아파트를 덜컥 계약했다가 엄청난 고생을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아무것도 모르고 계약한 아파트가 '알 박기' 문제로 3년간 착공도 못 했다.
조합장이 두 번이나 바뀌고,
시행사가 교체되며 혼란은 극에 달했다.
공사가 겨우 시작된 후에도 공사비 상승으로 추가 부담금이 발생해 조합원들끼리 싸우고 난리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 시기가 내가 영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이었다는 것.
조합원 자격을 유지하려면 1년에 한 번씩 한국에 들어와야 했고, 공사 현장 앞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머리에 띠 두르고 시위에 참여해야 했다. 16시간 비행기를 타고 와서 인천 공항에서 다시 동쪽 끝 하남까지
가 시위를 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려 4년이 지나 입주했을 때는 이미 조합원의 절반 이상이 자격을 상실한 상태였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아파트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이자 인내의 열매였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아무것도 없던 나에게 든든한 담보 역할을 해줬고, 지금의 사업과 딸아이의 졸업까지
가능하게 해 준 고마운 존재였다.
그래서 떠날 때는 꽤 섭섭하기도 했다.
현재 내 스튜디오에는 나를 포함해 동갑내기 친구 네 명이 함께 있다.
한 명은 고등학교 동창, 나머지는 모두 대학 동창이다.
디자인과 사진을 전공한 예술가(?) 아저씨들이 모여 각자의 방식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중 한 친구는 내년에 잠실에서 가장 핫한 아파트로 입주를 앞두고 있다.
부럽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며 남의 집 살이 하고
버텨온 그 인내심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즐기는 방법도 잘 알고 있다.
작년에는 '성내 미식회'라는 이름을 붙여 가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소주 한잔 기울였다.
술을 좋아하는 나에게 이 모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설레고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올해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성내 체육회'를 결성해 건강까지 챙겨볼 계획이다.
50대에 접어든 우리는 각자의 길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고,
이제 인생 2 막을 준비하는 중이다. 대화할 주제가 끊이지 않고,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다.
아마도 우리의 진짜 전성기는 지금부터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