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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인연(時節因緣)

by 함수규

어떤 사람들과는, 일정한 시간 동안만 함께할 수 있다.

그게 ‘시절인연’이라는 말의 의미다.

마치 유통기한이 있는 감정 같기도 하고, 적절한 온도에서만 유지되는 와인 같은 관계랄까.

남자들 사이엔 ‘불알 친구’라는 게 있다.

대개는 같은 동네에서 자라거나,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들이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관계, 그런 식의 것.

나는 어릴 적 이사를 자주 다녔다.

그래서인지 정해진 무리 없이 여러 동네에, 여러 얼굴의 친구들이 있다.

연말이면 여기저기 모임이 생기고, 그만큼 술을 마실 일도 많아진다.

12월과 1월은 술독에 잠긴 채 흘러가는 계절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도 벌써 5년쯤 되었다.

그 사이에 몇몇 친구들과는 연락이 끊겼다.

처음엔 이유를 몰랐다.

나는 그대로인 것 같은데, 그들이 변한 걸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이 조금씩 바뀌어간 걸까?

가치관이라는 건 생각보다 단단한 벽이어서,

언젠가부터 서로의 말이 상처가 되었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누가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들도 나처럼 조용히 연락을 끊었을 뿐이다.

한동안은 그 이유를 나에게서 찾으려 했다.

혹시 내가 너무 민감했나,

너무 많은 걸 기대했나.

하지만, 사람은 결국 환경을 닮아간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같은 연도에 태어나도,

서로의 방향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이젠 누군가에게 크게 상처받는 일은 드물다.

30명 넘는 직원들과 함께 일하며 감정이 무뎌졌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관계보다는 기능으로 보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좋다고 말할 순 없지만, 나쁘다고도 말할 수는 없다.

인연이란 건, 억지로 되는 게 아니다.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웃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생겨 있는 것.

감정은 쌓여야 생기는 것이니까.

나이를 먹을수록 곁에 남는 사람은 줄어든다.

그건 외롭기도 하지만, 때론 편하다.

적은 수의 인연에게 더 진심을 전할 수 있고,

가끔은 전혀 뜻밖의 새로운 사람이 내 삶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나는 오는 사람을 막지 않고,

떠나는 사람을 붙잡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일까.

내 곁엔 늘 새로운 얼굴들이 있다.

무슨 일이 있었든,

잠시라도 좋은 시간을 보냈다면,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건 분명, 고마운 시절인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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