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을 지나면서 나는 자주 ‘지천명(知天命)’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하늘의 뜻을 안다. 말은 간단하지만,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내 삶을 돌이켜보면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흐름이었다.
젊었을 때는 내가 길을 선택한다고 믿었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것은 우연과 바람,
그리고 보이지 않는 호기심이 이끌어낸 결과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천명이란 모든 것을 꿰뚫어 아는 게 아니라, 알 수 없음 자체를 받아들이는 일일지도 모른다.
스물아홉 무렵, 작은 디자인 회사에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매 시즌 반복되는 광고 전쟁 속에서,
우리는 이름도 없는 신생 업체로 밤을 새워 피티를 준비했다.
결과는 늘 차가웠다.
1등이 아니면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때로는 처음부터 정해진 결말을 위해 우리가 들러리로 불려 나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차선책이 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기꺼이 그 자리에 섰다.
그런 계절들이 쌓이면서, 내 스무 살 후반은 지쳐갔다.
아마 그래서 나는 사진으로 발길을 돌렸던 것 같다.
몇 년 후, 그 회사는 업계 최고로 성장했고,
대표는 지금도 내게 빚진 마음을 품은 듯 작은 배려를 건네곤 했다.
아마 함께 고생했던 시절이 남긴 묘한 연대감 때문일 것이다.
돌아보면, 인생이란 누군가의 어깨를 빌려 잠시 기대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지금의 내 곁에도, 그런 어깨들이 있다.
십여 년 전부터 함께한 직원들, 대학 시절 알바로 만난 친구들,
이제는 모두 삼십대를 훌쩍 넘어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멋진 조언을 해주기보다,
단지 열정을 잃지 않는 모습으로 남고 싶다.
그게 아마도 나다운 방식일 테니까.
젊었을 땐, 쉰이 넘으면 세상을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바뀌었고,
생각보다 더 많은 갈래와 변주가 존재했다.
지천명.
하늘의 뜻을 안다는 건 아마 정답을 아는 게 아니다.
오히려 불확실함 속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걷는 법을 배우는 것.
나는 지금 그 길 위에 서 있다.
조금 느리지만, 분명한 발걸음으로.
아마 이것이 내가 바라보는 지천명의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