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켰다.
커피잔은 이미 반쯤 비어 있고, 창밖에서는 회색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다.
즘은 시간이 정말 빨리 흘러간다. 손가락 사이에서 모래가 흘러내리듯, 잡으려 하면 이미 사라져버린다.
작년 11월 시작한 일본어 공부가 어느덧 1년이 되어간다.
책상 한쪽에 놓여 있는 히라가나 교재와 노트는 여전히 낯설지만, 낯설다는 사실 자체가 이제는 낯설지 않다.
동시에 세입자들의 전세 만기가 하나둘 다가오고 있다.
만기일은 언제나 정확하다. 숫자와 날짜는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사람의 감정이나 여유 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시간은 더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표면적으로 나는 패션사진 작가다. 고상하고 세련된 직업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뒷면에는 30명의 직원의 월급을 챙겨야 하는 소규모 회사의 대표이자, 다세대 건물의 세입자들과 전세 계약서를 들여다보는 건물주가 있다. 그 역할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오히려 가장 현실적이고 속물적인 일이다.
가끔은 그 두 얼굴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게 내 인생의 주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진을 시작한 건 결국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올림푸스 카메라를 집에 들였다. 그건 우리 집에 들어온 가장 값비싼 물건 중 하나였다.
어린이날이면 화양동 어린이대공원에서, 개나리꽃 아래에서 아버지는 우리를 찍어주곤 했다.
덕분에 내 앨범 속에는 또래들보다 칼라사진이 많았다.
사진 속의 나는 늘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조차 지금은 귀한 기록이 되었다.
나는 25년째 사진을 찍고 있다. 필름 시절의 긴장과 설렘을 아직도 기억한다.
현상소에 맡겨 놓고 며칠을 기다리던 시간, 그건 일종의 의식 같았다.
2000년대 후반 디지털이 필름을 넘어서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효율, 속도, 경제성. 프로 세계에서는 누구도 그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지금은 더 작고 더 가벼운 미러리스 시대다. 회사의 포토팀도 모두 그런 카메라를 쓴다.
하지만 어떤 기계를 쓰든,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사진은 결국 기억을 붙잡아 두는 일이다. 인간의 뇌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기에,
우리는 그 공백을 사진으로 채운다.
사진은 그 공백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증거물이다.
돌아보면 이 일로 살아남은 게 벌써 25년이다. 꽤 긴 시간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나는 사진을 좋아한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좋아하는 일은 결국 시간을 견디게 만든다.
창밖은 조금 더 어두워졌다.
나는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노트북 화면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묻는다.
“나는 왜 사진을 시작했을까?”
아마도 그 대답을 찾는 일이, 앞으로의 남은 시간 동안 내가 해야 할 작업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