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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유전자

by 함수규

나의 부모님은 참 여러 일을 하셨다.

어린시절 나는 성남이라는 작은 위성도시에서 살았다.

부모님 두분은 성남 외곽의 작은 회사를 다니시다가, 송파구가 생기기 전 이곳에서 터를 잡으셨다.

그 시절 성남은 조금 특별한 도시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어두운 역사의 도시였다.

1970년대 초반, 서울 도심의 빈민들이 강제로 외곽으로 밀려나면서 만들어진 곳.

섬유, 석유, 전자 공장들이 들어서고,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모였다.

그래서일까. 도시의 기운은 다소 거칠고, 교육보다 생존이 더 앞서는 분위기였다.

우리 부모님도 그 속에서 삶을 개척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중학교 1학년 초 서울로 전학을 갔다.

아마도 부모님은 예측되는 본인의 힘든 삶보다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주고 싶어 하셨다.

그래선지 무슨일이든 다하셨었다.. 음식점도 하고, 작은 술집도 하고, 학원버스도 몰고, 가사도우미도 하셨다.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철없던 시절, 길에서 부모님을 보면 괜히 모른 척한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철없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십대는 늘 쓸데없는 자존심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그러다 부모님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말 즈음.

특희 엄마의 강한 권유로 세차업을 시작하셨다.

주변의 고급 아파트 단지 세차권을 사기 위해 당시 3천만 원이라는 큰돈을 빌렸다.

당시 우리가족이 살던 반지하 전세금이 500만 원이던 시절이니, 모험이라기보다는 도박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선택은 맞았다. 80년대가 들어서면서 고급 아파트가 늘어나고, 자가용 시대를 맞이하려 다양한차들. 로얄살롱이나 프린스, 포니 같은 차들이 등장했다.

지금 들어도 어딘가 촌스럽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꿈꾸던 이름들이다.

부모님은 새벽 네 시면 늘 일을 시작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차들은 더 지저분했고, 일은 더 힘들어졌다.

무거운 물통을 지하에서 끌어올리며, 겨울에도 땀을 흘렸다.

나도 종종 도왔다. 특히 비나 눈이 온 다음 날은 꼭 따라 나섰다.

가끔 어린 학생이 세차를 돕는 걸 본 차주들이 물었다. “누구냐?”

“아들입니다.” 그러면 안쓰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한 분은 검은색 르망을 모는 대학 교수님이 계셨는데 항상웃으시면서

부모님 일을 도와주는 내게 착하다고 하시면서

나를 볼 때마다 매번 착하다고 하시면서 5천 원씩 용돈을 주셨다.

그 돈으로 친구들과 떡볶이를 사 먹으면, 세상은 꽤 견딜 만해졌다.

부모님의 사업은 다행이 몸은 힘들지만 세차업은 꽤나 잘되었다.

7~8년 뒤 부모님은 동네에 작은 새 빌라를 마련하셨고,

은퇴할 때까지 25년 넘게 같은 일을 이어가셨다.

마지막에는 차가 몇 대 안 남을 정도로 사양길이었지만, 쉽게 손을 놓지 못하셨다.

돈 때문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과 미련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영국서 돌아와 한창 사진가로 전성기였던 시절, 삼십대 말쯤 되던 어느 날,

아버지가 전날 술을 많이 드셔서 대신 어머니 일을 도우러 나간 적이 있다.

일이 거의 끝날 무렵, 머리가 희끗한 어르신이 다가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물었다.

“누구십니까?”

“아들입니다.”

그러자 그는 만 원을 건네며 말했다. “참 착하군요.”

나중에 어머니께 들으니, 그분이 바로 옛날에 나에게 5천 원을 주던 교수님이었다.

지금은 서울의 한 대학 학장이 되어 있었다.

당시 나도 열심히 내 인생을 개척하고 만들어가던 시절이어서 경제적으로

안정되던 시절이었다.

돈보다는 긴 세월동안 한분야에서 성실하게 일하시면서

어른의 성품을 유지하시는 모습에 존경심이 느껴졌다.

십대에 만났던 분에게, 마흔이 넘은 내가 다시 팁을 받은 셈이다.

인생의 경험은 가끔 이렇게 묘하게 이어진다.

사람은 출생을 선택할 수 없다.

누구나 부잣집에서 태어나길 바라지만, 내맘대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나 역시 당연히 부자는 아니었지만, 아주 가난하지도 않았다.

내겐 무엇보다 부모님이 스스로 길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는 건 큰 자산이었다.

그건 지금도 내 안에 남아 있다.

이제는 내가 부모가 되었다.

그래서 딸아이에게도 늘 말해주곤 했다. 부모의 존재와 삶의 경험이 왜 중요한지, 어떻게 사는지.

지금 뉴욕에서 혼자 세상과 맞서고 있는 딸도 잘 해낼 거라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 가족의 유전자에는, 조금은 거칠지만 조금은 우직한 헝그리 정신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살아보니 그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유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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