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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준비하는 나

by 함수규

요즘 나는 퇴촌의 작은 정원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 나무도, 꽃도 없다.

몇 년 동안 밭농사를 짓던 흔적만 흙 속에 남아 있다.

그저 돌을 옮기고, 땅을 고르고, 자리를 만든다.

누가 보면 별일 아닌 일 같지만,

이건 내게 꽤 중요한 일이다.

돌아보니 이곳에 온 지 벌써 15년이 되었다.

딸아이가 어릴 때는 캠핑을 자주 다녔다.

캠핑이란 게 참 묘하다.

그건 자연 속에서 가족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시간이다.

아빠는 텐트를 치고,

아이들은 풀밭에서 뛰어놀고,

저녁엔 고기 굽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진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잠시나마 ‘완벽한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

그 시절엔 캠핑장이 아직 많지 않았다.

그러나 캠핑 붐이 일어나면서 점점 예약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다 어느 날,

포천에 주말농장을 갖고 있던 친구의 친척 덕분에

처음으로 내가 머물 수 있는 땅이라는 걸 경험했다.

그날 밤, 텐트 밖에서 별을 보며 생각했다.

‘나만의 캠핑장이 있었으면 좋겠다.’

부모님도 그 생각을 반기셨다.

“주말농장 좋지. 흙 만지며 사는 게 건강에도 좋아.”

그렇게 셋이서 주말마다 양평, 홍천, 남양주를 돌았다.

어떤 날은 비 오는 도로 위에서 부동산 사무실을 찾았고,

어떤 날은 마을회관 옆의 빈집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1년쯤 지났을까.

우리의 예상 지도에도 없던 ‘퇴촌’이라는 곳에서 발길이 멈췄다.

처음엔 그저 스쳐가는 땅이었는데,

묘하게 마음이 남았다.

땅이라는 건 결국 인연의 속도로 다가오는 것이다.

조금 비싸게 샀지만,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

처음엔 온 가족이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다.

여름이면 고추와 오이, 가을이면 배추.

어머니는 늘 흙을 만질 때 가장 젊어 보이셨다.

딸아이는 흙 속에서 달팽이를 찾아다녔고,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았다,

친구 가족들도 놀어와서 같이 수확을 하고 저녁엔

불을 피우고 고구마도 구워 먹고 했다.

세월이 지나 나와 딸아이는 미국으로 떠났다.

다시 돌아온 지금도 부모님은 여전히 밭을 지으셨지만,

언젠가부터 조금 힘들어하셨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이제 밭 말고, 정원으로 만들어보면 어때요?”

어머니는 웃으셨다.

“그래, 이제 꽃도 좀 심어야지.”

정원을 준비한다는 건,

결국 나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너무 빠르게 살았다.

결정을 빨리 내리고, 감정을 빨리 잊었다.

사진처럼 순간을 붙잡는 데만 익숙해졌고,

기다리는 법을 잃어버렸다.

정원은 그 잃어버린 ‘느림’을 천천히 되돌려준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심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

이 느린 준비의 시간 자체가 이미 정원의 일부다.

삶에도 그런 시간이 있다.

아직 시작하지 않았지만,

이미 무언가가 자라기 시작한 시간.

저녁이면 정원 끝에 서서 삽을 든다.

바람이 나뭇잎 대신 흙냄새를 실어 온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트럭 소리,

그리고 조용히 스며드는 어둠.

그 속에서 나는 천천히 하루를 접는다.

이건 단순한 노동이 아니다.

앞으로 올 계절을 맞이하는 일종의 의식이다.

정원을 준비하는 나는

이제 서두르지 않는다.

세상은 여전히 빠르고,

사람들은 여전히 앞만 본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

조용히, 느리게, 나의 계절을 향해 간다.

그게 지금의 나에게 꼭 맞는 속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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