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는 늘 새벽에 일어나셨다.
해가 뜨기 전, 부엌 불을 켜고 일하실 준비를 하셨다.
나와 동생의 도시락을 싸고, 나가기 전에 꼭 반찬을 만들었다.
특히 소시지를 굽는 날이면, 기름 냄새가 방 안을 천천히 채웠다.
그 냄새는 내 잠을 깨우는 알람이었고,
그 소리들은 내 학창시절의 배경음악이었다.
물 끓는 소리, 쌀 씻는 소리,
그리고 무언가 다짐하는 듯한 숨소리.
그건 어머니의 억척과 부지런함이 만들어낸 리듬이었다.
아마 그 리듬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것이다.
요즘은 그 리듬이 들리지 않는다.
지난주 퇴촌을 다녀왔다.
나는 이것저것 밀린 일을 하느라 바빴고,
그 사이 와이프가 어머니와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멀리서 바라보는 둘의 모습이 왠지 따뜻해서,
나는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집에 오는 길, 와이프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어머니가 곧 투석을 시작하셔야 한대.”
순간, 차 안의 공기가 묘하게 무거워졌다.
올 게 왔구나 싶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너무 빨리 온 것 같아 마음이 덜컥했다.
투석이라는 단어는 이상하게 메마른 느낌이 있다.
피를 돌게 하는 과정인데도,
그 말엔 생기보다 결핍이 먼저 느껴진다.
어머니는 그 말을 담담히 받아들이셨다 한다.
“그냥 조금 불편해지는 거지. 할 일은 해야지.”
그 말이 어머니답다고 생각했다.
할 일은 언제나, 어머니에게 삶의 다른 이름이었다.
내년이면 2룸 한 곳의 계약이 끝난다.
그곳에 어머니를 모실 생각이다.
그 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복잡했다.
모신다는 건 함께 있는 일이지만,
그만큼 멀어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어제는 춘천 마라톤을 다녀왔다.
늦가을 강원도의 새벽 공기는 얇은 필름처럼 투명하고 차가웠다.
운동화 끈을 매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달리기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날은 단 하나였다 — 생각을 비우기 위해서.
몸속의 피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건
인생의 속도가 느려진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사실이 두렵다.
달리면 심장이 뛰고, 피가 돌고, 숨이 차오른다.
그게 살아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제 그것을 잃어가고 있다.
어머니의 손은 점점 차가워지고,
내 다리는 점점 뜨거워진다.
우린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셈이다.
나는 앞으로, 어머니는 천천히 뒤로.
언젠가 그 속도가 같아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가 오면 나는 잠시 멈춰 설 것이다.
숨을 고르고, 어머니의 손을 잡을 것이다.
그 손이 얼마나 차가워졌든,
그 안에는 여전히 나를 키운 리듬이 살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