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기억
내가 부모님 얼굴도 모르고 자랐다면 얼마나 살면서 외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의 아버지는 1943년에 태어나셔서 6.25 전쟁통에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얼굴조차 기억이 없으시다고 하셨다.
나이 차이가 아버지뻘 되시는 큰 아버님의 손에 조카들과 같이 자라셨다.
어린 아버지에게는 큰 아버님이 손에 쥐어준 사랑만이 전부였다.
내가 느끼는 외로움의 깊이를 이해하려면
그 시절 아버지가 겪었을 아픔을 조금이라도 상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도 감히 예상도 못 하지만, 우리나라가 아주 살기 힘든 시절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된장국과 보리밥을 못 드신다.
어릴 적 너무 드셔서 냄새만 맡으셔도 괴롭다고 하신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쌀도 아주 최고급쌀만 사서 드신다.
밥통도 젤 비싼 것만 사서 쓰시고.,, 지금도 집에 압력밭솥, 전기밥솥, 등등 밥맛을 결정짓는 주방용품이 10개는 넘게 있다.
한때 나는 아버지가 철이 없어 보인 적이 있었다.
나는 저렇게 살지 않겠다고 사실 무시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고,,,
아버지는 고집이 엄청 강하시다. 가던 길만 가시고 드시던 것만 드시고, 하던 일만 하신다.
의심도 많으시고, 금전 관계도 일절 안 하시고 심지어 내가 첫차 살 때 보증도 안 서주셨다.
( 90년대만 해도 보증인이 있어야 차를 구매 가능했었다.)
그러나 반면 음악이나.영화도 좋아하시고 감성은 엄청 풍부하셨다.
국민학교 시절 매일 회사에서 주는 보름달 빵과 요구르트를 점심시간마다
30분 넘게 자전거 타고 오셔서 우리 남매에게 주실 정도로 자상하셨다.
저녁엔 방안의 연탄난로에 물을 데워서 나와 동생을 발을 닦아주시곤 하셨다.
거의 매일 저녁 소주 한 잔 하시다가 하모니카로 섬소녀를 불어주시기도 하고..
그러다가 부모님이 그리우시면 눈물을 보이시기도 했다.
저 시절부터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는 술이었던 거 같다.
그와 반대로 어머니는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시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항상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중학교 시절부터의 우리 집은 어머니의 주도로 조금씩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했었다.
일 때문에 서울로 이사 오게 된 것도 다 어머니 덕분이다.
당시에는 서울변방의 시골 잠실이었지만 지금은 가장 살기 좋은 동네가 되었으니
안목도 있으셨던 거 같다.
나는 정확히 반반의 유전자를 나눠 받은 거 같다.
현실적인 부분은 엄마를 감성적인 부분은 아버지를...
내가 자식을 낳아 키워보고 50살이된 지금 나는 어떤 아빠일까?
어릴 적 이해 못하고 답답해 보였던 상황들이 하나둘씩 아주 조금은 선명해진다.
한 10년 전 아버지랑 국제시장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신파의 최고봉으로 무장한 영화여선지 아버지는 영화 내내 눈물을 흘리셨다.
그 영화 속 한 인생을 보는 동안,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감정이 복잡해졌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 영화는 아버지의 삶을 압축해 보여준 것처럼 보였다.
사람의 삶을 2시간짜리 영화로 본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어쩌면 아버지는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으셨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다시 한국 들어와서 느낀 부모님은 생각보다 많이 연로해 지신 상태이다.
가는 세월을 감히 막을 수는 없겠지만 아프지 않게 행복하게 인생의 끝자락을
즐기시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버킷리스트가 있는 것처럼 어머니 아버지도 있을 것이다.
되도록 대화를 많이 해서 찾아내서 해드리려 한다.
작년 한 해
아버지, 어머니는 많이 편찮으셨었다. 나 역시 맘고생도 있었고,,
올해는 좀 좋아지셔서 리스트를 하나씩같이 지워보려 한다작년 한 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많이 편찮으셨다. 그 때문에 나도 맘고생을 했다.
그러나 올해는 조금씩 좋아지시며 건강을 되찾아가고 있다.
나는 올해 부모님이 원하셨던 것들을 하나씩 이루어드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들의 버킷리스트를 함께 채워나가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사랑을 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