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낼 수 없는 상황에서 나를 위로하기
도저히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내 삶을 두고 휘몰아쳤다. 나는 '할 수 없다'라고 수없이 이야기했지만, 내가 아닌 타인들은 자신들도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며 몰아가듯 나를 몰아세웠고, 어느새 감당하기 힘든 그 일은 내가 맡게 되었다. '하면 된다'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아무리 못하겠다고 해도, 그것이 단순 투정으로 들렸던 걸까. 자신도 못하겠다고 하면서 나에게는 "그냥 하면 돼요"라고 가볍게 이야기하는 그 말에 더 무너져 내려앉았다. 그냥 해서는 될 일이 아닌데,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어떤 일을 해야 할 경우, 어떤 일을 해내야 할 경우 나를 더 많이 갉아먹어야 하고, 나를 더 고통스럽게 연마해야만 그걸 해낼 수 있곤 했다. 애초에 타오를 수 있는 지점이 달랐다. 안 그래도 희미한 불씨를 가지고 나를 태우고, 불살라야 했으니까.
그런데 이 일 같은 경우는, 내가 정말 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었다.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나는 대부분 내게 주어진 일을 못해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너는 할 수 있을 거야"라고 하지만 그 일을 하기 위해 해내기까지 울고, 또 울며 고통에 몸부림치며 나는 나를 너무 아프게 해야 했다. 실제로 대학원에서 논문을 쓸 때도 울면서 했는데 그걸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자해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자해를 할까. 하지만 나에겐 그랬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선 나를 그만큼 더 아프게 해야 했다. 그래서 아무리 잘할 수 있다고 해도 그 과정이 나에겐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나를 갉아먹고, 내가 부서져가며, 나락으로 나를 몰아세워 절박한 상황에서 비명을 질러대야만 하는 것이다. 내 결과물은 나의 비명의 결과이다. 내가 울며 질러댄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너무나도 쉽게 '하면 된다'라고 할 때 그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누구도 '그냥'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냥' 되는 것도 없을뿐더러. 나 같은 사람만 해도 '그냥' 됐던 적은 없다. 그러니 쉽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까. 그건 비겁한 말일뿐이다. 그냥 하면 되면, 본인이 하면 되는 것을 남에게 떠넘겨가면서까지 그냥 하라니.
이런 상황에서 '힘내'란 말은 어떠한 위로도 되지 않았다. 괜찮을 거란 말, 괜찮다는 말도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괜찮지 않은데. 내가 괜찮지 않은데 왜 타인들이 괜찮다고 하는 걸까. 괜찮을 거라니, 괜찮기까지 고통스러울 시간을 버텨내야 하는 건 나인데 어쭙잖게 던지는 위로가 더 아팠다.
나는 무력하기만 했고, 나의 능력은 한계가 있고, 내가 내야 하는 용기는 가혹하기만 했다. 그래서 무력하게 울고 또 울었다. 회사 계단에서 울고, 지하철에서 울고, 집에 와서 또 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우는 것밖에 없었다. 울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진정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를 내려놓는 행위일까. 이럴 때 가장 필요한 말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건 "너의 슬픔을 알아"라는 말이었다. 그래,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두려움, 내가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고통, 그리고 그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란 불안,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슬픔. 이 슬픔을 안다고, 그래 네 눈물을 안다고, 네가 힘들 거란 걸 안다고. 힘내야 된다는 말보다, 너의 힘듦을 안다고. 누군가는 나에게 '꼴좋다'라고 이야기했다. 네가 감당해야 할 일이니 감당하라고. 도대체 얼마큼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인지 나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내가 이 상황에서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사실 아직은 모르겠다.
그래서 슬프고, 계속 눈물이 난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기어코 내게 하게 만드는 일. 그 일은 나를 더 강하게 할까? 아니면 나를 더 몰락하게 할까. 내가 좋아하는 말 중 "몰락할 수 있는 것이 용기"다는 말이 있다. 이참에 몰락해 버릴까. 어차피 나는 영어를 하지 못한다고 했고, 국제무대에서 나의 무능력과 바닥 수준의 능력이 드러난다면 그것이야말로 엄청난 몰락이 아닐까. 몰락할 용기를 지금 펼쳐야 하는 걸까.
나는 어디까지 몰락할 수 있을까. 설령 잘한다 해도, 그만이고 몰락하면 내가 용기 낸 것이니 밑져야 본전인 걸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싶은데 너무 잘해야만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할 수 없는 일에 할 수 있는 정도를 해내야 한다. 사는 것이 내 마음 같지가 않고, 사람들은 모두 일을 떠넘기기에 급급하다. 그러면서도 그 일에서 공을 세우길 바란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의 뜻대로 공을 세우지도, 우릴 드높이지도, 우릴 세계적으로 알릴 기회에 알릴 마음도 없다. 그저 나는 몰락할 거다. 내가 낼 수 있는 것은 몰락할 수 있는 용기고, 그들이 기대하는 바를 실현해주고 싶은 마음 따윈 없다. 내가 내게 기대하는 건, 내가 몰락해도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몰락하기까지 너무 나를 아프게 하지 않고, 몰락하게 되더라도 너무 아프지 않기를. 이대로 가라앉고 싶다. 요즘 신조어 중에 "나락도 락(rock)이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나락할 거고, 추락할 거고, 그게 나의 락이다. 나는 잘하지 않을 거고, 나는 기대에 부응하지 않을 거다. 박시하 시인의 <무언극>이라는 시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극이 시작되는데
대본이 없다
대사 없이 연기를 하라고?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역을 해내지 못하면
극이 끝나지 않을 텐데
똥을 밟고 미끄러진 기분이야
누군가 말한다
돈을 내면 대본을 줄게
연기를 하려면
거지의 연기를 해야 해
나를 사야 해
불쌍하게도
춤을 추겠어
옷을 벗겠어
바닥을 기어가지
대본도 없는 이 무언극 같은 상황에서 나는, 춤을 출거다. 옷을 벗고, 바닥을 길거다. 몰락하고, 추락하고, 나락까지 떨어져 바닥을 기는 것. 그래 나락의 바닥을 기며 춤을 추자. 내가 할 수 있는 '극'은 이것뿐이다.
그게 지금 내게 할 수 있는 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