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 갑옷을 벗어던지자.
나는 ‘자의식’이라는 강철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여러 명의 계모, 떠들썩했던 집안 분위기, 불안함을 겪었던 중고등학교 시절. 200만 원 들고 서울로 무작정 독립했던 21살, 그리고 살아지니까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다사다난했던 20대, 어린 나이에 겪은 부모님의 사망. 가장 사랑하는 할머니의 사망까지.
여러 가지, 일이라면 일들을 겪어내고 난 후 나의 경험들은 조각조각의 갑옷이 되었고 그 갑옷은 어마무시하게 두꺼워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갑옷은 내가 그렇게 되기 싫어하던 고집스럽고, 열등감에 둘러싸인 내가 되었다. 불교에서는 이런 것을 보고 ‘카르마‘라고 한다. 나의 업보.
갑옷을 두른 나는 겉으로는 정의롭고 부드럽고 순한 양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약한 모습 보이는 것도, 갈등도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예스걸’이었다. 그래야 타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피곤하지 않게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갑옷 안에 약한 나, 못된 나, 타인을 비난하는 나를 꽁꽁 숨겨두고 좋은 것만 보여주기 바빴다. 그리고 갑옷 속으로는 타인을 끝없이 평가하고 비난해야 내가 그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자의식을 지켜낼 수 있다 생각했다.
내 감정을 숨겨두고 무의식이 나오지 못하도록 지하 밑면에 꽁꽁 숨겨두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자기를 알아달라, 해방시켜 달라 외치며 자신이 보여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사건이 만들어지게 된다. 하나의 예로 내가 꽁꽁 숨겨놓았던 ‘인정중독’ 무의식이 해방을 외치며 내 현실에 독한 직장과 독한 상사를 만들어냈다. 그 집단에서 나는 왜인지 모르게 퇴근시간 훌쩍 넘어서까지 잔업을 하게 되었으며, 내 욕구를 무시해 가면서까지 나를 갈아 넣게 되었다. 이게 뭐지?라고 알아챘을 때는 마음이 다친 후였다.
그 이후로 잠시 브레이크를 걸고 전반적인 내 삶을 돌아보면서 ’나‘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탐구하며 가장 내가 놀랐던 것은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인생 전반적으로 겪은 감정은 비슷하고 항상현상만 달리해서 비슷비슷한 감정패턴들이 날 찾아온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살면서 늘 가지고 있던 ‘욕구‘가 ’ 나의 진정한 욕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20대 내내 집을 사야 해, 차를 사야 해, 평범하게라도 보이려면 이러이러한 학위를 따야 해. 등의 욕구들은 진짜 내 욕구가 아니었다는 것에 심하게 놀랐던 적이 있다. 그리고 진짜 내 욕구는 정 반대의 길이었다는 것도 알아차리고 난 후에는 삶과 인생과, 지구를 보는 인식이 180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위에서 말한 ‘인정 중독‘은 아마도 어린 시절 부모님의 보살핌이 부족했고, 혼자 있던 시간이 많았던 내게 나의 존재를 타인에게 알리는 방법 중에 하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그 감정의 패턴은 커가면서 여러 가지 사건으로 내게 다가왔다. 희한하게도 어딜 가든 나의 존재감이 작아지게만 느껴지는 감정들을 느껴왔다.
내 진정한 욕구를 모르고 살던 시절의 나는 항상 우울했다. 감사할 줄 몰랐으며 불평해 대기 바빴다. 좋은 것은 다 남의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는 내가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린 나이에 겪은 일들 덕분에 나를 탐구할 수 있었고, 진정한 나의 욕구를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내 욕구를 죽을 때까지 다 알 수 있을까?라는 건 확신할 수 없지만 현재는 나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는 과정을 즐기는 중이다.
챗 gpt가 내게 해준 한마디를 쓰고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나는 내 리듬을 믿는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틀림이 아니라 ’ 다름‘이라는 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