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코레르 박물관(Museo Correr)
코레르 박물관의 관람 동선 마지막에 이르렀다. 회화관으로 가려면 2층 전시실을 나와 3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회화관은 베네치아 공화국 시대 초기 예술에서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의 그림들을 모아 놓은 곳으로 전시된 작품은 모두 140여 점에 달한다. 전시된 방들만 해도 박물관 3층의 19개 전시실을 차지할 정도다.
그림이 전시된 방들을 임의적으로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이해하기 쉽도록 시기별로 정리를 해 보았는데 다음과 같다. 초기 베네치아 회화(13~14세기), 페라라 및 볼로냐 회화(15세기), 비바리니 가문의 회화(15세기 말), 베네치아의 르네상스 회화(16세기), 플랑드르 및 네덜란드 회화로 나눌 수 있겠다. 이것은 박물관의 관람 동선을 따라가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내 나름대로 분류해 본 방법이며 이야기도 이렇게 진행할 예정이다.
코레르 박물관의 회화관은 베네치아에서 활동했던 화가들의 작품을 시대별로 전시하고 있다. 많은 작품 수량에도 불구하고 정작 일반인들에게 익숙한 그림들은 거의 없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식상할 수 있다. 그 점이 다소 아쉽다.
1) 13~14세기 베네치아 회화(Pittura veneziana del XIII e XIV secolo)
먼저 들어서는 방은 13~14세기 베네치아 회화를 전시한 곳이다. 이곳에는 베네치아 공화국 초기의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초기의 베네치아 화가들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보다는 작은 나무에 그림을 그린 패널화가 많았다. 패널화는 주로 재단화였는데 이 시기까지만 해도 유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대중화되지 못했고 달걀 노른자에 안료를 섞어 쓰는 템페라 기법이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에서 제단화가 발달한 또 다른 이유는 베네치아의 시작과 관련이 있다. 이민족의 침입을 피해 석호로 도망쳐서 나라를 세운 베네치아는 초기에는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 관할 하에 있는 속주였다. 베네치아의 통치자를 의미하는 도제(Doge) 역시 동로마 황제가 임명하거나 승인하는 관직이었다. 그러므로 초기의 베네치아 예술은 동로마 제국에서 유행한 성화상(Icon)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많이 제작했던 것이다.
ㅣ그리스-베네치아 화가(Pittore greco-veneto)의 성모자(Madonna col Bambino)ㅣ
베네치아 석호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6세기경으로 추정되지만 도시국가를 형성한 것은 8세기경이었다.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속주였다. 자치적으로 지도자를 선출했지만 동로마 제국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내부적으로는 척박한 석호에 도시를 세운 어려운 환경이었고 외부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의 속주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는 그 속에 머물지 않고 석호와 접한 아드리아해로 진출하면서 항해술과 해군력을 성장시켜 상업을 발전시켰다. 13세기에 접어들면서 베네치아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뒷받침한 국력을 과시하며 더욱 강대한 국가의 토대를 마련했다. 1204년 4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1571년 레판토 해전에 승리하면서 베네치아 공화국은 절정기로 향했다.
이 시기에 베네치아가 지배한 지역은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베네치아 북부와 지중해 연안지역 그리고 그리스의 크레타 섬 등 여러 지역들을 아우르고 있었다. 베네치아는 육지의 영토 뿐 아니라 바다의 해역도 지배하고 있었는데 아드리아해는 물론이고 이오니아 해와 지중해까지 뻗어나갔다.
그리스-베네치아 화가(Pittore greco-veneto)는 13세기 초부터 17세 중반까지 그리스에서 베네치아 본토로 이주하거나 현지에서 베네치아 화가들과 교류하며 활동하던 화가들을 일컫는 말이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베네치아 화풍과 결합한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냈기에 다른 그림들과 구별하고 있다.
그들이 그린 재단화를 보면 금색 바탕에 엄격한 성모의 표정 그리고 정형적인 도상 구도가 특징이다.
ㅣ복자 줄리아나 디 콜랄토의 목관(Cassa della Beata Giuliana di Collalto)ㅣ
복자 줄리아나 디 콜랄토(Giuliana di Collalto, 1185~1262)의 유해를 안치했던 나무로 제작된 함이다. 복자(福者)는 가톨릭 교회에서 성인 다음으로 공경하는 사람으로, 줄리아나는 베네토 트레비소 지역의 콜랄토 가문 출신으로 12살에 수도복을 입고 수녀가 되었다. 36살에 베네치아 주데카 섬으로 이주하여 산 카탈도 수도원을 재건하고 원장을 지냈으며 줄리아나가 죽은 1262년에 교회 묘지에 묻혔다. 1290년 산 카탈도 수도원의 재건 공사로 줄리아나의 묘지를 이장하는데 유해가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는 기적이 일어나 예술가들로 하여금 정교한 목관을 제작케하여 그 속에 안치했다.
줄리아나는 1733년 교황 베네딕토 14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고 이를 기념하여 목재 함 대신에 금속제 함을 만들어 유해를 옮겼고 그 유해는 현재 주데카 섬의 산트 에우페미아 교회(Chiesa di Sant'Eufemia)에 안치되어 있다. 코레르 박물관에 전시된 목관은 한때 복자 줄리아나를 안치했던 목관으로 지금은 빈 상태로 전시하고 있다.
목관의 정면에는 성모자가 있고 무릎을 꿇고 있는 복자 줄리아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화려한 금박에 원색의 강렬함이 무척 인상적이다.
ㅣ성 아우구스티노, 베드로, 세례 요한, 복음사가 요한, 바울, 제오르지오(Santi Agostino, Pietro, Giovanni Battista e Giovanni Evangelista, Paolo, Giorgio) 제단화ㅣ
이 제단화는 파올로 베네치아노(Paolo Veneziano)와 그의 협업자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14세기 베네치아 회화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파올로는 베네치아 화파의 시조로 불릴 만큼 유명한 화가였다.
재단화는 원래 지금의 산 도나 디 피아베인 베네토 주의 그리솔레라(Grisolera) 교구 교회에 있던 것으로 중앙 패널의 양옆에 배치했던 재단화였으나 중앙 패널은 없어지고 양쪽의 패널만 남은 상태다.
패널은 두 개로 각각의 제단화에는 세 명의 성인들이 그려져 있다.
왼쪽에 있는 패널에는 성 아우구스티노(S. Agostino), 성 베드로(S. Pietro), 세례 요한(S. Giovanni Battista)이 있고, 오른쪽에 있는 패널에는 복음사가 요한(S. Giovanni Evangelista), 성 바울(S. Paolo), 성 제오르지오(S. Giorgio)가 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상징물을 보면 알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교복을 입었고 성 베드로는 열쇠를 들고 있으며 세례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복음사가 요한은 복음서를 들고 있고 성 바울은 칼을 들고 있으며 성 제오르지오는 갑옷을 입은 기사 모습이다.
재단화의 바탕은 모두 금색으로 처리하였으며 각 성인들은 하나 같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비잔틴 미술의 전통적인 기법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림 속에는 고딕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는데 성인들의 옷감 무늬와 질감이 정교하고 화려하게 묘사한 것이 그것이다.
ㅣ세례 요한(San Giovanni Battista)과 성모자(Madonna col Bambino)ㅣ
벽에는 두 개의 그림이 걸려 있다. 서로 다른 그림이지만 카메라 앵글에서 하나로 담았다. 엄밀히 말하면 세례 요한(San Giovanni Battista) 그림 한 점과 성모자(Madonna col Bambino) 그림 한 점이다. 두 그림 모두 그리스-베네치아 회화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을 예고하고 준비한 예언자다. 그는 유대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때를 두르며 메뚜기와 야생꿀을 먹고 고행을 했다.
그림에서도 보여지듯이 '세례 요한'은 낙타털 옷에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로다'(Ecce Agnus Dei)라고 적인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템페라 기법의 그림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크게 훼손되는 단점이 있는데 이 그림은 700년이 넘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금박 장식과 선명한 색채가 잘 보존되어 있다.
다른 또 하나의 작품은 '성모자'다.
제단화의 금색 바탕은 14세기 회화에서 보여지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신성함을 의미했다. 그림에서 성모의 길고 우아한 손가락 모양은 비잔틴 양식의 전통적인 기법이다. 코레르 박물관의 회화관에는 '성모자'의 패널 제단화가 아주 많은데 시대별로 조금씩 바뀌는 변천 과정을 담고 있어서 그림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ㅣ안토니오 베니에르 도제의 조각상(Ritratto del doge Antonio Venier inginocchiato)ㅣ
이 조각상은 1394년에 야코벨로 달레 마세네(Jacobello dalle Masegne)가 조각한 도제 안토니오 베니에르의 모습이다. 재질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조각상을 옆에서 보면 도제가 무릎을 꿇고 앉은 모습이어서 '무릎 꿇은 도제 안토니오 베니에르의 대리석 동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야윈 얼굴에 가슴에 올린 두 손을 꽉 쥐고 기도하는 듯한 모습이다. 도제라는 직책이 버거운 것일까? 인간은 마음 속에 어떤 간절함을 가지고 있을 때 어렵고 힘든 상황을 헤쳐 나갈 지혜을 얻는지도 모르겠다.
야코벨로의 형은 당대의 유명한 조각가 피에르파올로 달레 마세네다. 둘은 독립적으로 작품을 제작했지만 때로는 함께 협업하기도 했다.
ㅣ야코벨로 델 피오레(Jacobello del Fiore)의 '성모와 잠자는 아기 예수'(Madonna col Bambino)와 미켈레 잠보노(Michele Giambono)의 '성모와 방울새를 든 아기 예수'(Madonna col Bambino e il cardellino)ㅣ
야코벨로와 잠보노는 사제지간으로 잠보노가 제자다.
왼쪽의 야코벨로 델 피오레(Jacobello del Fiore)의 '성모와 잠자는 아기 예수'(Madonna col Bambino)는 141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화려한 고딕 양식을 따르고 있다. 아기 예수의 잠 자는 모습이 무척 평온해 보이지만 미술에서는 장차 닥쳐올 예수의 수난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수난은 바로 죽음이다. 그러고 보니 성모가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표정이 슬프면서도 눈빛은 많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오른쪽의 그림은 미켈레 잠보노(Michele Giambono)가 그린 '성모와 방울새를 든 아기 예수'(Madonna col Bambino e il cardellino)다. 1440년에 제작된 작품이다. 그림의 방울새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구전에 따르면 방울새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예수의 이마에 박힌 가시를 부리로 뽑아주려다 깃털에 피가 묻어 붉게 변했다고 한다.
그림 속에는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부유함이 베어 있다. 옷의 질감은 부드러워 보이고 금색의 세공은 화려하다. 성모 마리아의 머리에 쓴 왕관은 사후에 승천하여 받은 '성모 대관'으로 구원자의 어머니로서 천상의 여왕 모습을 의미한다. '성모 대관'은 15세기까지 이탈리아 회화에서 크게 유행하던 화풍이었다.
2) 15세기 페라라 및 볼로냐 회화(Pittura Ferrarese e Bolognese del XV secolo)
페라라 회화와 볼로냐 회화는 15세기 이탈리아 북동부 에밀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독자적인 예술이다.
당시 피렌체에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면 페라라에는 에스테 가문이 있었다. 에르콜레 1세(Ercole I d'Este)가 페라라의 공작이 되면서 에스테 가문이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안드레아 만테냐, 레오나르도 다 빈치, 티치아노, 라파엘로, 코스메 투라 등 당대의 최고 화가들이 페라라 에스테 궁정에서 일을 했으며, 조스캥 데 프레 등 음악가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아 페라라로 모였다.
페라라와 볼로냐의 회화와 베네치아 회화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베네치아 회화가 색채와 빛의 부드러운 조화를 중시했다면, 페라라와 볼로냐 회화는 날카로운 윤곽선과 금속적인 질감 등을 살려 인물의 강렬한 감정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두 회화는 서로 다른 방식의 차이를 보였으나 15세기 베네치아는 주변 지역인 페라라, 볼로냐, 만토바 등의 예술품을 수집하고 교류하던 중심지였기에 코스메 투라, 프란체스코 델 코사의 작품을 베네치아인들이 구입하였고 그것을 박물관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ㅣ측면을 향한 남성의 초상(Ritratto maschile di profilo)ㅣ
이 그림의 작가가 누군지는 모른다. 다만 옆모습을 그린 인물의 윤곽선은 매우 날카롭고 질감은 찌르는 듯 예리해서 단번에 페라라 화풍의 회화임을 알 수 있다. 녹색의 배경은 정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고 검은색의 옷은 귀족의 품위와 고결함을 느끼게 한다.
15세기 전후에 이탈리아에서 시작하여 유럽으로 번진 르네상스는 문예부흥으로 어두웠던 중세의 암흑을 벗어난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를 부활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인문주의 시대의 부활이기도 했다. 미술사에서 인물의 옆얼굴 모습이 등장한 것도 고대 로마 제국에서 발행된 주화 속의 황제 모습을 회화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안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의미가 이런 것이 아닐까?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지는 다름이 아니라 옛 것을 토대로 조금씩 모습을 바꾸는 미소 같은 얼굴인지도 모른다.
ㅣ코스메 투라(Cosmè Tura)의 피에타(Pietà)ㅣ
코스메 투라는 페라라에서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에스테 가문의 궁정에서 일하며 미술 공부를 했다. 젊어서는 파도바로 가서 잠시 견습 미술생 과정을 거쳤는데 이때 에스테 가문에서 그를 후원을 했다. 다시 페라라로 돌아온 코스메 투라는 궁정으로부터 급여를 받으면서 보르소 데스테와 에르콜레 1세 데스테를 위해 평생 일했다.
피에타는 코스메 투라가 1460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며 죽은 아들 예수의 시신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다. 그림에서 성모의 모습은 부드러운 반면에 예수의 모습은 딱딱하고 날카롭다. 그 모습이 이질적이면서도 조화로운 것은 왜일까? 인물의 뒷배경에는 십자가가 세워진 골고다 언덕이 보이고 왼쪽 나무 위에는 원숭이가 앉아 있다. 그것은 예수의 신성함과 원숭이의 열등함을 대비시켜 인간이 저지른 원죄를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그림의 군데군데 로마 기병대가 보이는 것도 성경에서 말하는 당시의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다. 칙칙한 하늘의 배경색이 슬픔을 가중시키는 것 같다.
ㅣ안토니오 레오넬리(Antonio Leonelli da Crevalcore)의 '남성의 초상화'(Ritratto d'uomo)ㅣ
이 그림은 처음에 페라라 궁정 화가인 발다사레 데스테(Baldassarre d'Este)의 작품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에서 안토니오 레오넬리가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 젊은 남성의 초상화로 당시의 화풍을 따라 옆모습을 그렸으며 얼굴 윤곽이 날카롭게 묘사되었다. 그림을 그린 안토니오 레오넬리 다 크레발코레는 볼로냐 출신의 화가지만 그림에서 보여지는 날카로운 묘사와 세밀한 디테일은 아마도 페라라에서 수련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자의 초상화'는 다른 이름으로 '젊은 약혼자의 초상화'(Ritratto di giovane fidanzato)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그림 아래쪽의 창틀 위에 놓인 책(보통 기도서)에 금반지와 진주 보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혼을 앞두고 있거나 혹은 막 결혼한 상태임을 나타낸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그림의 얼굴이 향하는 왼쪽에는 이 남성과 짝을 이루는 신부의 초상화도 있어서 서로 마주 보게 놓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남성이 입고 있는 빨간색의 옷과 머리에 쓰고 있는 빨간 모자는 좁은 배치 공간을 가득 채울 만큼 강렬하고 열정적이다. 15세기에 붉은색 염료는 매우 귀하고 비싼 재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싼 염료가 그림의 거의 절반을 채우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경제적인 부와 사회적 지위가 높고 부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ㅣ안젤로 마카니노(Angelo Maccagnino)의 '여성의 초상화'(Ritratto di donna)ㅣ
안젤로 다 시에나(Angelo da Siena)로도 알려진 안젤로 마카니노가 그린 '여성의 초상화'이다. 크기가 약 44 x 33 cm의 작은 나무 패널에 그린 템페라 기법의 그림이다. 그림을 그린 안젤로 마카니노는 시에나 출신이지만 1439년경에 페라라로 이주했으며 1444년부터 페라라 궁정 화가로 일한 기록이 있다. 페라라로 이주한 안제로 마카니노는 그가 죽을 때까지 에스테 가문의 후원 아래 화가로 일했다.
'남성의 초상화'가 페라라 회화에서 보이는 특징인 인물의 선명한 선 처리와 옷감의 강렬하면서도 거친 질감 그리고 전체적인 화려함이 느껴지는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면, '여성의 초상화'는 오똑한 콧날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부드럽고 섬세한 분위기를 안겨준다. 같은 페라라 회화임에도 불구하고 어찌 이렇게 단순하면서 사실적인 묘사에만 치중하고 있을까?
'여성의 초상화'에서 보이는 헤어스타일은 그물망 머리 장식으로 아 베스파이오(A Vespaio)라 부른다. 금 실이나 실크실을 격자무늬로 엮어 만든 그물망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여기에 진주와 보석을 박기도 한다. 그 시대의 유행이다. 어디 그 뿐이랴. 같은 시대에 유행했던 또 다른 여성의 헤어스타일은 코아쪼네(Coazzone)라고 하는 길게 늘어뜨린 땋은 머리 형태도 있었다. 이렇듯 자신을 치장하는 데 돈이 있어야 가능하고 타인의 눈길과 이목을 끄는 돋보임도 부의 과시욕으로 표현된다고 하면 진정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일까?
안젤로 마카니노(Angelo Maccagnino)의 '여성의 초상화'(Ritratto di donna)와 비슷한 그림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이탈리아 밀라노 폴디 페촐리 박물관(Museo Poldi Pezzoli)에서 소장하고 있는 화가 피에로 델 폴라이올로(Piero del Pollaiolo)가 그린 '여인의 초상화'(Ritratto di dama)란 작품이다.
이 시기에 그려진 '남성의 초상화'나 '여성의 초상화'라는 이름의 그림들은 참 많았으며 그림 속의 얼굴들은 하나 같이 옆얼굴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시대의 유행이었다. 문화적인 쓰나미였을까? 그런 많은 그림들 속에서 비슷한 그림을 찾는 것은 어쩌면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말하는 유사성의 법칙(Law of Similarity)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눈이 그림 속의 유사한 요소들만 인식하고 전체를 판단하게 만드는 경향성 말이다. 따지고 보면 구체성과 정밀성에서 서로 다를지라도 전체적으로 비슷한 몇 개가 연결된다면 유사성으로 인식하는 단순함이 빚어낸 허상일지도 모른다.
ㅣ성 제로니모의 죽음(Morte di San Girolamo)ㅣ
'성 제로니모의 죽음'은 4대 교부 중의 한 명인 성 히에로니무스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성 제로니모'를 그린 화가들은 많다. 그 중에서도 1502년에 비토레 카르파초가 템페라 기법으로 그린 '성 제로니모의 장례식'(Funerali di san Girolamo)이 유명하다. 산 조르조 델리 스키아보니 학교(Scuola di San Giorgio degli Schiavoni)에서 보관하고 있는 이 그림은 141×211cm로 제법 큰 그림이다.
코레르 박물관의 회화관에 있는 '성 제로니모의 죽음'은 동굴 근처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을 그렸다. 그림의 중앙에 임종하는 성 히에로니무스가 누워 있고 주변에는 그를 애도하는 수도사들이 서 있다. 성 제로니모의 유해 아래에 사자가 있는데 바로 성인의 상징물이다. 누워 있는 유해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더라도 사자를 보면서 성 제로니모임을 알게 된다.
회화관에는 '성 제로니모의 장례식' 그림도 있었으나 보지 못한 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ㅣ페라라 화파(Pittore Ferrarese)의 '그리스도의 성전 봉헌'(Presentazione di Gesù al Tempio)ㅣ
회화관에 전시된 '그리스도의 성전 봉헌'(Presentazione di Gesù al Tempio) 그림은 1455년에서 146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에는 안드레아 만테냐의 작품으로 단정했지만 근래에 그림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보스턴 미술관에 있는 만테냐 원작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후로 코레르 박물관의 '그리스도의 성전 봉헌' 그림은 보스턴 미술관에 있는 만테냐 작품의 복제품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복제품을 그린 화가는 알 수 없으나 페라라 화파 혹은 볼로냐 화파의 화가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