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새해를 맞이했다고 올해는 금주를 하겠어.와 같은 다짐은 처음부터 할 생각도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마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습자지 보다 얇은 내 의지력은 어김없이 밤 11시가 되고서야 무너졌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안일과 아이들로부터 해방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의 공식적인 퇴근시간은 밤 10시다. 근로자의 워라밸을 위해 정시 출퇴근이 문화로 자리 잡아가는 요즘, MZ(M세대) 엄마로서 밤 10시 퇴근은 사실상, 근로기준법 위반이지 않는가! 출근도 아침 7시에 칼 같이 하는데 말이다. (아이가 아프면 철야 근무는 당연하고 주말 공휴일은 출장이 기본이다.)
하여간 오늘 퇴근은 두 딸들의 방학이슈로 무려 한 시간이나 늦었으니 속은 이미 천불이요. 머리는 지끈거렸다. 늦은 퇴근 후 혼자만의 시간이 달콤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해방감의 달콤함과 소주의 쌉싸래함, 맥주의 청량함의 찰떡궁합을 도저히 나는, 물리칠 재간이 없다.
나라고 노력을 안 해본 건 아니다. 배가 부르면 생각이 안 날까 싶어 목구멍까지 차도록 저녁을 먹어도 봤고 다이어트한답시고 한 달 내내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다만 그 이후에 나를 덮쳐오는 후폭풍, 이를테면 보상심리이다. 그동안 먹지 않은 만큼의 양을 한꺼번에 먹는다던가, 목표한 체중을 찍은 다음 무장해제되어 되려 다이어트 전보다 체중이 더 많이 나가게 된다던가. 이러한 부작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음주생활이 더 낫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람이란 게 또, 옆에서 ‘쿵’을 하면 ‘짝’을 해야 인지상정 아닌가! 우리 부부는 (술 먹을 때만) 쿵작이 잘 맞는 술친구다. 슬슬 술이 생각나는 밤이 되면 신랑을 향해 눈썹 하나 까딱대면 두말 않고 냉장고를 열어 술을 꺼내온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이가 부부라더니, 역시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못해도 오늘은, 술을 마셔야 하는 이유는 끊임없이 생성된다. 날이 좋아서, 날이 추워서, 기분이 좋아서, 속상해서, 재미있는 영화가 나와서 등등이 있다. 뭐든 갖다 붙이면 그게 이유가 된다는 것에,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이유에 기어이 맞장구를 쳐주는 신랑 덕분에 마치 그것들이 매우 합리적이고 그럴싸한 핑계가 된다.
아이들이 잠들어 이제야 고요해진 거실이다. 은은한 스탠드 하나 켜놓으니 고급 이자카야가 부럽지 않다. 부엌에서 보글보글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렇다. 날씨가 유난히 추웠기에 오늘은 뜨끈한 어묵탕이다. 살얼음 보돌보돌하게 낀 소주 한잔에 뜨끈한 어묵국물을 마다할 자,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