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염소 와인이라고, 들어들 보셨는지

by 나이서

올해 앞자리가 바뀌었다. 한동안 마흔이 된다는 사실에 침울했지만 울적하게 있은들 세월이 나만 비켜갈 일도 없거니와 이미 정통으로 맞았다. 족집게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른 새치도 그렇고 또렷하게 깊어진 팔자주름도 그렇고 세월은 나를 제대로 강타한 게 명징했다.


막상 마흔이 되니 별일도 아니었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어제와 같은 일상은 여전했다. 어쨌거나 마흔이 되고 공식적인 첫 행사로 친정식구와의 모임이 있었다. 잠깐 언급하자면, 나의 주량 DNA는 100% 모계 유전이다. 모친으로부터 일찍이 조기교육을 받아 술과 안주의 적절한 배율이랄지 자고로 소주란 슬러시상태에 이르렀을 때 먹어야 된다 따위를 배운 바, 꾸준하고 성실하게 실천을 하고 있는 바이다.(엄마, 미안)


가족들과 둘러앉아 맛있는 술과 음식을 먹으며 몇 시간씩 수다를 떨던 중 보약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마흔에 둘째를 출산한 새언니는 새벽마다 아이가 깨서 온 집을 휘젓고 다니는 통에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고 했다. 맞벌이의 삶은 전쟁터와도 같은데 자꾸 체력이 떨어져서 보약을 한 재 지었다고 했다.


나는 어디서 주워들은 게 있어, 여자들은 30대부터 앞자리가 바뀔 때마다 흑염소를 먹어주는 게 그리 좋다더라 말했다. 옆에 있던 엄마는 먹어봤더니 확실히 체력이 좋아지더라며 내 말에 신빙성을 보태주었다. 다만 입맛이 너무 좋아지는 바람에 살이 많이 찌더라는 부작용도 함께 일러주었다. 새언니는 그 부작용을 익히 알고 있어 먹을 수 없다고 했다.

넉넉히 준비한 소주는 이미 동이 났다. 친정오빠는 기어이 세라젬 뒤에 몰래 숨겨놓은 엄마의 와인과 양주를 찾아왔다. 치사하게 왜 숨겼냐고 면박 아닌 면박을 주자 엄마는 머쓱한지 건치를 들어내며 웃어 보였다. 숨긴 게 아니고 그냥 거기 두었을 뿐이라 하였다. 비싸고 좋은 술들을 진열장이 아닌 구석에 두는 것이 엄마의 취미인지는 의문이었지만 나의 술 욕심이 엄마로부터 왔다는 것만은 확실해졌다.

와인과는 오랜만의 조우였다. 한때 우아하고 지적인 도시 여성이 되고 싶어 소주 대신 와인을 즐긴 적이 있었다. 와인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나는 와인 전문점에 들러 여러 와인을 추천하는 대로 왕창 사 들렀다. 그때 그 와인집 사장님의 환한 미소는 아직도 선명하다.


한 병에 2천 원도 안 하는 소주에 오래 길들여져 있었던 탓일까. 만원도 안 하는 와인이나 10만 원씩이나 하는 와인이나 다 맛있는 걸 어쩌나. 그렇다면 아무래도 양이 많은 것이 좋겠다. 그날부터 코스트코에서 제일 싸고 큰 레드와인을 하루 걸러 한 병씩 비워내기 시작했다. 도수가 낮고 달달해서 그런가 먹어도 먹어도 취하지가 않는데 남은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톡 떨어뜨려 기어이 한 병을 비어내면 그제야 뭉근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게 역시 우아하고 세련된 와인을 먹길 잘했다고 자찬을 했다.


“요즘은 와인 안 먹나?” 친정오빠가 물었다. 1일 1병의 와인으로 인해 두 달 만에 8kg이 쪄서 혀를 내두르며 끊었다고 했더니 옆에 있던 신랑이 거들었다.


“와인이 와이프한테는 흑염소예요”


신랑의 농에 한술 더 받아쳤다.

“이제 나 마흔이니까, 보신 좀 해야겠다. 오늘 흑염소, 내가 다 먹는다.”

이미 N병의 소주를 먹고 와인 한 병을 싹 비웠더니, 다음날 내 속도 개운하게 비워졌다. 변기통을 부여잡으며 일주일은 거뜬히 술생각은 나지 않겠다 싶었다.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뭐든 끝장을 봐야 미련이 없다고. 와인에 대한 미련은 이제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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