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1 – 4화] 벽이 숨 쉬는 소리- 문과 문 사이의 심장박동
[시즌 1 – 4화] 벽이 숨 쉬는 소리 - 문과 문 사이의 심장박동
인트로
도시는 벽으로 구획되고, 벽은 길을 막는다.
하지만 어떤 벽은 숨을 쉰다.
그 숨결을 들은 사람만이, 벽이 사실 문과 문 사이의 심장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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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류장 시계는 매일 08:08에서 멈췄고,
빨간 고무공과 여덟 번의 신호음이 나를 불렀다.
을지로 골목의 첫 번째 문을 지나자,
반복되는 코너 끝에서 두 번째 칸의 음각 ‘2’를 보았다.
그리고, 벽은 조용히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나를 안쪽으로 초대했다.
1.
계단은 오래된 종이 냄새로 젖어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어둠이 가볍게 출렁였다.
“들어가고 싶어.”
방금 내뱉은 그 한 마디가 아직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문 표면의 ‘2’가 희미하게 맥박 쳤다.
두 번—쉬고—두 번.
나는 귓불을 스쳤던 그 바람이 단순한 기류가 아니라, 호흡이라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다.
2.
“누구… 있나요?”
내 목소리가 계단 벽에 맞아 둥글게 접혀 돌아왔다.
대답 대신, 벽이 아주 얕은 들숨을 쉬었다.
페인트가 갈라진 틈에서 미세한 싸락 먼지가 빨려 들어갔다가, 날숨과 함께 되돌아 나왔다.
그 호흡에 맞춰 내 심장도 속도를 조절하는 느낌.
08:08처럼 정확하지 않지만, 여덟의 그림자가 묻어 있었다.
3.
“하민.”
속삭임은 계단 아래에서 올라오지 않았고, 위에서 내려오지도 않았다.
그냥 벽 안쪽에서, 마치 얇은 피부 뒤로 울리는 혈관 소리처럼 들렸다.
“누구죠?”
한동안 정적.
그리고 다시, 아주 낮게.
“선택이… 곧 시간이다.”
그 말은 이제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의 억양은 달랐다.
누구지? 알고 있는 사람의 발음이었다. 도윤?
나는 본능적으로 휴대폰 화면을 켰다.
통화 기록 08:08.
신호 없음.
4.
두 번째 칸의 문턱을 넘자, 복도는 곧장 이어지지 않고 옆으로 휘어졌다.
벽이 파도처럼 만곡을 만들고, 어둠은 물결 따라 잔잔히 흔들렸다.
그 순간,
삑—
신호음이 한 번 울렸다.
잠시 후 또 한 번.
둘,
넷,
여섯,
여덟까지 간 뒤,
복도의 공기가 뚝하고 멈췄다.
“여덟을 세라고?”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왼쪽 벽에 손을 얹고, 숨이 멈춘 지점까지 발을 옮겼다.
그 자리에서 벽은 분명히 숨통을 붙잡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벽의 호흡. 그게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게 분명했다.
5.
“나가고 싶은가, 들어가고 싶은가.”
회색 코트를 입은 사내의 목소리가 그때 문득 되살아났다.
“통과는 앞으로, 탈출은 반복.” 그가 했던 말.
나는 손바닥으로 벽을 누르고, 머리를 바짝 붙였다.
벽 안쪽에서는 물이 강바닥을 문지르는 소리처럼 미세한 쓸림이 있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조용히 말하자,
벽이 한 번 크게 들숨을 쉬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은 손잡이 없이, 살갗처럼 얇은 경첩으로 스스로 벌어졌다.
6.
안쪽은 낡은 아카이브 같았다.
철제 서랍 수십 개가 벽 안에 박혀 있었고, 서랍마다 얇은 카드가 꽂혀 있었다.
카드의 모서리는 모두 미세하게 닳아 있었고, 거기엔 시간이 손때처럼 묻어났다.
나는 맨 위 줄의 서랍 하나를 뽑았다.
안에는 작은 필름이 들어 있었고, 라벨에는 단 한 단어—선택.
“필름을 보라고?”
눈을 가까이 대자, 필름 표면에 미세한 장면들이 움직였다.
내가 고무공을 잡아채던 순간,
아이의 “고마워요,” 신호음 여덟 번, 그리고 되감기.
그다음 컷엔 내가 망설이던 하루가 나왔다.
아이가 공을 잡기 위해 뛸 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장면은 그 지점에서 끊겼다. 색이 쏟아지고, 화면이 검게 타들어갔다.
7.
“이건… 가능성이었나?”
내가 택하지 않은 미래의 죽은 필름.
벽은 이번엔 아주 길게 날숨을 내쉬었다. 서랍이 줄줄이 흔들리며, 카드들이 서걱— 소리를 냈다.
“당신이 나를 보여주는 건가요?”
대답은 없었다. 대신 서랍 줄 끝에서 한 칸이 덜컹 열렸다.
라벨: 08:08.
나는 천천히 손을 집어넣었다.
차가운 금속 뒷면에서 미열이 전달됐다.
“기록이 아니야.”
스스로에게 말하듯 내뱉었다.
“심문이야.”
문은 선택을 기록하지 않는다.
선택을 캐묻는다.
8.
멀리서 발자국이 들려왔다.
균일한 속도,
여덟 걸음—멈춤—여덟 걸음.
서랍 사이 통로 끝자락에 검은 실루엣이 나타났다.
“도윤?”
내가 부르는 동안, 실루엣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걸음은 규칙이었다. 나를 안심시키지 못하는 규칙.
가까이 다가온 순간,
나는 그 얼굴이 도윤의 얼굴과 아주 조금씩 어긋나 있는 걸 알아차렸다.
눈동자의 초점, 입술의 각도, 목의 움직임… 어느 틈새 사이로 기계적인 지연이 껴 있었다.
“네가 맞아?”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먼저 전화했잖아.”
9.
“거짓이야.”
입에서 먼저 튀어나온 말.
“넌… 녹음이지?”
실루엣은 대답 대신, 나와 완벽히 같은 호흡으로 들숨—날숨을 반복했다.
그리고 벽이 뒤에서 같은 박자로 호흡을 맞췄다.
나를 중심으로, 벽과 실루엣과 공기가 하나의 메트로놈이 되어 흔들렸다.
어지럽다.
나는 주머니에서 고무공을 꺼냈다.
손바닥 가운데 올리고, 천천히 여덟을 셌다.
“하나, 둘, 셋…”
여덟을 채우자,
고무공의 진동이 실루엣의 박자와 미세하게 어긋났다.
균열.
그 틈에, 나는 손을 넣듯 말을 집어넣었다.
“난 되감지 않아. 통과할 거야.”
10.
실루엣의 눈동자가 반 바퀴 굴렀다.
그는 내 목소리를 흉내 내던 것을 멈추고, 자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네가 남는다.”
“어디에?”
“여기.”
그가 발로 바닥을 톡 쳤다.
그 울림이 서랍들을 지나 벽의 심장으로 옮겨 붙었다.
잠시 후, 벽 전체가 한 번 크게 들숨을 쉬더니,
서랍 라인이 두 개 더 열렸다.
거기에는 내가 모르던 장면들이 줄지어 있었고, 라벨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두 번째 문: 애통 / 준비
“아직 내 문이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실루엣은 웃지 않았다.
“문은 네가 준비되었다고 ‘말’했을 때가 아니라, 네가 준비되었다고 ‘살았을 때’ 열려.”
“그걸 누가 결정하죠?”
실루엣은 내 등 뒤 벽을 가리켰다.
“여기.”
11.
“그럼 증명해 줘.”
나는 고무공을 들어 올렸다.
“되감기 대신, 앞으로.”
공이 손바닥에서 한 번 튀었다.
그 순간 벽의 호흡이 흐트러지고, 실루엣의 걸음이 처음으로 박자를 놓쳤다.
“… 네가 뭘 하려는지 알아.”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여덟이 아니라, 아홉을 만들 거지.”
나는 대답 대신, 손목의 시계를 바라봤다.
08:08—에서 08:09로 미세하게 넘어가는 찰나.
나는 고무공을 복도 끝, 어둠이 더 진한 지점으로 던졌다.
공은 벽과 바닥을 맞고 여덟 번 튕긴 뒤,
마지막으로 아홉 번째 미약한 소리를 냈다—틱.
12.
벽이 숨을 멈췄다.
서랍들이 한꺼번에 덜컹거리며 닫혔다.
실루엣은 잠깐 흔들리더니, 마치 필름이 끊긴 화면처럼 검은 점들로 흩어졌다.
그리고, 아주 얇은 금속성의 찬 기척이 내 발목을 스쳤다.
뒤돌아보니, 내가 들어왔던 틈이 사라져 있었다.
복도는 더 깊어졌고, 바닥의 줄눈은 어딘가로 기울어졌다.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벽은 숨만 쉬는 게 아니었다.
벽은 결정한다.
누가 통과하고, 누가 남는지.
클리프행어
복도의 끝에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리고 그 웃음 뒤에, 내가 잘 아는 목소리가 겹쳤다—
“하민, 뒤돌아보지 마.”
엄마의 목소리였다.
다음 화 예고
[1-5화] 금속 위의 속삭임 ― “누가 네 이름을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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