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뜨락 심리상담 후기
착한 내담자의 기만
마인뜨락 심리상담후기
나: 오늘은 조금 일찍 왔네요. 오느라 고생했어요.
내담자: 아니에요. 오늘은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왔어요.
나: 그래서 교복을 입고 있군요. 교복 입은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내담자: 맞아요. 제가 교복을 입고 온 적은 없어요.
나: 오, 알고 있었군요. 오늘처럼 집에 들르지 않으면 좀 더 여유롭게 상담실에 올 수 있는데, 굳이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는 이유가 있을까요?
내담자: 교복을 입고 있기 싫어서요. 교복을 입고 있으면 같은 학교 애들이 알아볼 것 같아서 교복을 굳이 입고 싶지 않아요.
나: 그렇군요. 교복을 입기 싫네요. 친구들이 알아볼 것 같아서 그런가 봐요.
내담자: 음.
나: 원하지 않으면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담자: 예전의 저였다면 분명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갔을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진 것 같이 느껴지는 게,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에서 하지 않으면 그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거든요. 그래서 이야기를 하기 싫지만, 이야기를 해보려고요.
나: 짧은 시간에 엄청 깊은 생각을 했네요. 굉장해요. 이건 분명히 내담자가 똑똑해서 가능한 것 같아요. 이야기를 해준다고 해서 정말 좋아요. 하지만 너무 힘들면 꼭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걸 기억하면 좋겠네요.
내담자: 네. 많이 힘들면 중간에 이야기드릴게요. 지난번 저희 상담에서 나눈 이야기가 저한테는 너무 좋았는데요. 상대방에게만 맞추지 않으려고 생각을 하면서 이번 한 주를 지냈단 말이죠.
나: 좋아요. 계속 이야기해 주세요.
내담자: 제가 아파서 오지 못했을 때, 엄마가 밥을 먹으라는 말에, 제가 먹기 싫었음에도 먹었던 것이 엄마에게 맞춰준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죠. 그리고 제 의지로 먹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데요. 제가 오늘 학교에서 친구들하고 관계가 비슷하다는 걸 느꼈어요.
나: 어떤 부분이 비슷할까요?
내담자: 친구들한테도 제가 전무 맞춰주고 있었는데요. 어떻게 깨달았냐 하면 친구들하고 같이 놀러 가기로 했는데, 친구들이 놀러 갈 장소를 선택하는데 한 친구가 저한테 "내담자는 어디든 다 좋지? 그럼 우리 여기로 가자!"라는 말을 했어요.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고 어디든 좋다고 이야기를 했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좀 다르게 느껴졌어요. 친구들한테도 제가 착해빠진 사람으로 보이는 것 같았거든요.
나: 음. 그렇군요. 중요한 부분을 깨달았네요.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죠? 더 이야기해 볼까요.
내담자: 네. 그래서 친구들한테 "나는 다른 곳에 가보고 싶은데, 너네 생각은 어때?"라고 물어봤거든요? 그랬더니 저한테 어디든 좋다는 말을 한 친구가 "헐.. 너 그런 말도 할 줄 알았어? 네가 어디 가자고 한 건 처음이야!"라고 대답했어요. 이어서 "너는 그럼 지금까지 일부로 네가 원하는 걸 우리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좀 실망이야. 그냥 예전처럼 하지?"라고 말했어요. 이 말을 듣고 저는 진짜 어이가 없었거든요.
나: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요. 같이 놀러 다닐 정도로 친한 친구가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는 게 정말 어이없네요!
내담자: 그러니까요. 진짜 어이가 없어서 제가 "그냥 놀러 갈 장소를 정한다길래 나도 내 생각을 말한 것뿐이야. 이게 그렇게 실망할 일이야?"라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친구가 "어. 좀 그래. 그냥 네가 말주변이 없고 뭐든 좋아하는 애인줄 알았거든. 근데 너도 원하는 게 있었다고 하니까, 그럼 지금까지 원하는 걸 이야기하지 않은 거잖아. 다른 애들은 모르겠는데, 난 약간 기만당한 느낌인데?"라고 말하는 거 있죠? 세상에. 진짜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싶었어요.
나: 기만이라..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잘 해결이 되었나요?
내담자: 아니요. 아직 해결되지는 않았어요. 제가 "의견 한 번 이야기한 게 기만당한 느낌이면, 내 의견을 여러 번 이야기하면 너는 기절초풍하겠네. 나는 지금까지 너의 의견이 괜찮았고 좋았으니까, 그리고 다른 생각도 안 했으니까 네 의견이 좋다고 한 거지. 나는 너를 기만한 적이 없어. 왜 그렇게 생각해?"라고 물어봤거든요. 그랬더니 친구가 "너랑 이야기 안 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 나 지금 학원 가야 하니까."라고 하면서 갔어요.
나: 그렇게 끝났군요. 언젠가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하게 되겠죠?
내담자: 네. 아마 다음에 상담실에 오기 전에 만나서 이야기할 것 같아요. 3일 정도 후에 만나야 하거든요. 같이 학원에 가야 해서. 그리고 학원 끝나고 같이 놀기로 했는데 이렇게 이야기가 되었네요.
나: 만나는 날이 있네요.
내담자: 네.
나: 일단, 이야기를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오늘 친구들과 이런 일이 있었네요. 덕분에 내담자에 대해 알 수 있어서 좋았어요. 말해보니 어떤가요?
내담자: 말하고 나니까 속이 좀 후련해요. 명치 쪽이 뭉친 느낌이 있었는데 많이 풀린 느낌이에요.
나: 좋네요. 이야기 잘했어요.
내담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친구들하고 관계를 엄청 잘못한 건 아닌 듯한데, 진짜 제가 많이 잘못했나요?
나: 제가 볼 때 잘한 점과 잘못한 점이 있어요. 만약 내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면, 어떤 부분을 먼저 들어볼 것 같아요?
내담자: 그냥 다 이야기해 주세요. 듣고 싶어요.
나: 그래요. 이런 부분이 바뀐 부분이네요.
내담자: 아! 그렇네요. 제 의견을 제가 이야기하네요. 신기해요. 그리고 편해요. 하지만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속상했어요.
나: 정말 똑똑한 건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중요한 부분들을 잘 잡아내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담자는 정말 특별하네요. 방금 이야기한 부분들도 너무 중요하죠. 내담자가 스스로 의견을 낸 부분은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요. 그냥 친구들이 원하는 곳으로 놀러 가도 솔직히 상관없었죠?
내담자: 네. 상관은 없었어요. 하지만 제가 가고 싶은 곳도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나: 잘했어요. 그렇게 이야기를 해보는 게 진짜 중요하죠. 그럼에도 친구들이 가자고 하는 곳에 따라다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기 때문에 친구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가 돼요. 약간 배려 아닌 배려를 받은 기분이랄까요. 마치 신호가 빨간불인데, 어느 자동차가 횡단보도 앞에 서서 내담자를 보고 얼른 지나가라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일까요.
내담자: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불필요한 배려를 받은 기분이네요. 오히려 배려를 하지 않아야 하는 상황에서 배려를 해준 느낌이네요.
나: 너무 똑똑해요. 진짜 완벽하게 알아들었네요. 바로 그 부분 때문에 기만당한 기분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횡단보도에서 보행자가 갈 수 없는 빨간불신호에 건너가라고 기다려준 셈이죠. 이 부분이 잘못한 부분이에요. 하지만 그렇게 잘못한 것도 아니거든요. 의견을 이야기할 때 충분히 잘 이야기했다고 생각해요.
내담자: 아무리 그래도 기만당한 느낌이라니.. 제가 잘 이야기했다고 해도 친구가 그렇게 받아들이면 어쩔 수 없는 건가요? 그게 너무 속상해요.
나: 그럴 수 있죠.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내담자가 이야기한 방식은 오히려 친구에게는 독이 된 느낌이에요. 왜냐하면 기만당한 느낌이 잘못되었다는 전제가 내담자의 이야기 안에 깔려있었거든요. 그걸 혹시 알았나요?
내담자: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마치 제가 착했다가 나쁜 애로 변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친구에게 내가 나쁜 게 아니라 네가 이상하게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나: 그래서 기절초풍이라는 단어도 썼군요. 친구가 듣기에는 많이 상처받았을지도 몰라요.
내담자: 헉. 그렇군요. 친구의 기분은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가 의견을 낸 것만 생각했어요.
나: 이제 이 부분을 살아가면서 계속 다듬어나가야 하는 것이죠. 자, 내담자는 이제 상대방을 무조건 수용한다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죠. 여기에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을 배우는 거죠.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가 된다면 거기에 맞춰서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게 이야기를 하는 걸 알아가는 과정이에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까요?
내담자: 네. 이해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역시나 또 힘드네요. 왜 이렇게 나에 대해 알아가는 게 힘들까요.
나: 쉽지 않은 과정이에요. 그렇지만 내담자는 충분히 잘해주고 있어요.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는데, 친구를 만나지 건에 어떻게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친구가 어떻게 이야기를 할지 생각해 보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친구의 입장을 수용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친구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죠. 민약 친구가 내담자처럼 계속 따라다니기만 하다가 갑자기 의견을 냈다면, 내담자는 어떻게 반응했을지도 생각을 해보고, 다양한 상상을 해보면 도움이 될 거예요.
내담자: 네. 친구랑 잘 만나야 할 텐데. 걱정되네요. 손절하고 싶지 않은 친구거든요.
나: 손절한 친구가 아니라는 생각만으로도 잘 해결될 것 같은 기분이에요. 나도 내담자가 친구랑 잘 이야기하길 기도할게요.
내담자: 감사합니다.
친구와의 관계는 늘 중요하다.
가족이 최소단위의 사회생활이라면, 학교에서 친구들과 만나는 건 중요한 10대의 발달과제이기 때문이다.
친구와 잘 지내는 것은 사회성과 연관이 있다.
하지만 내담자는 사회성이 온전히 발달된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수용만 해왔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친구와 어떻게 해결을 하는지가 중요한데, 아마 잘 해결할 것 같다.
이렇게 조금씩 사회성을 키워나가다 보면 어느새 내담자도 사회구성원으로서 잘 지낼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음 상담에서는 친구와 어떻게 해결이 되었는지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