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만에 잡은 개인적인 약속이었다. 처음으로 온라인 모임의 글친구들과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날. 나에게는 큰 용기와 도전이 필요한 일이었다. 8년간 전업주부로서의 고립을 깨고 세상으로 한 발 나아가는 순간이라 기대를 품었다.
웬일로 남편이 시간이 된다면서 아이들을 오후 6시까지 봐준다고 했다. 미리 일어나서 쌀밥과 미역국, 가자미구이, 떡갈비, 떡볶이까지 가족이 먹을 식사 준비를 마치고 서둘러 출발했다. 내 끼니까지 챙길 여유는 없었지만,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아이들과 떨어져 글친구들과 모임이라니 오랜만에 설레는 긴장감이 좋았다. 모임은 기대 이상으로 즐거웠고 3시간이 30분처럼 지나갔다. 멤버들이 준비한 예쁜 모양의 빵과 과자처럼, 시간이 아까워서 아껴 먹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오후 5시가 가까워지자 아이들에게 계속 전화가 왔다. 통화를 마친 뒤에도 둘째가 영상통화를 걸어대는 통에 마지막 대화에는 끼지 못했다. 다들 아쉬워하며 2차로 자리를 옮겼지만, 내게는 통금시간이 다가왔다. 급하게 인사를 한 뒤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왕복 3시간 거리.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고 버스를 다시 타야 했다. 시간이 지체되어 6시를 넘긴 30분, 남편의 전화가 울렸다.
“어디야? 빨리 와. 6시까지 온다며! 나 일하러 가야 돼.”
도착시간이 30분 지연되자 남편의 재촉 전화가 왔다.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빨리 가겠다’고 달래면서 어쩐지 직장 상사가 떠올랐다. 사실은 전혀 미안하지 않고 억울하기만 했다. 몇 달 만에 아이들에게서 벗어난 3시간의 자유도 나에게는 사치였나? ‘응’, ‘아니’ 늘 감정 없이 단답형 대답만 하던 남편이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이 화를 내는 것이라니 씁쓸했다.
마음은 무거웠지만, 이 시간조차 아까워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 서서 모임에서 선물로 받은 책을 읽었다. 김정 작가의 <단절을 딛고 걸어갑니다>라는 책인데 경력이 단절된 전업주부들의 삶을 인터뷰해 이야기로 풀어냈다.
‘딱 내 얘기구나.’
툭툭 내뱉은 한 자 한 자가 가슴에 박히는 기분이었다.
머피의 법칙. 지하철에 이어 버스도 주말이라 배차 간격이 길어서 좀처럼 타기 어려웠다. 결국 약속했던 6시를 넘겨 1시간 늦게 도착하고 말았다. 냉랭한 남편은 얼굴도 보지 않고 쌩하니 회사로 갔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면서 배가 고팠다. 남편과 아이들이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은 뒤, 불어 터진 짜장면 하나를 식탁에 덩그러니 남겨 두었다. 먹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낮에 해놓았던 음식이 남아 있어 밥을 뜨고 맥주 한 캔을 땄다.
“엄마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아이들의 물음에 갑자기 화가 폭발했다.
“내가 너네 밥하고 뒤치다꺼리하는 사람이야? 나는 평생 집에만 있는 사람이야? 나도 더 늦기 전에 꿈도 이루고 인생도 다시 찾고 싶어!”
대상을 찾지 못한 분노가 화풀이하듯 폭발하면서 공중에 흩어졌다. 그러고는 오열하고 말았다. 이런 모습은 나조차 낯설어 당황스러웠다. 아이들 앞에서 크게 소리 내 울어본 적이 없었는데 순간 참기가 힘들었다. 갑자기 밥 먹다가 우는 엄마에 놀란 아이들이 덩달아 울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너희들 잘못이 아니야, 엄마가 미안해.”
근데 내 잘못도 아니야.
우리 잘못이 아니야.
책에 담긴 그녀들의 시름이 가슴에 사무치게 다가왔다. 우리는 왜 죄도 없이 죄인처럼 살아야 하나, 아이들의 뒤에 가려져 그림자처럼 사는 삶이 왜 당연한 것일까, 전업주부 8년 인고의 세월은 어째서 이력서에 한 줄도 적지 못한 공란이 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