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의 시작 / 왜 제주 4.3 인가
연재 중이던 '어서 오세요, 고양이 식당입니다'를 끝마친 이후,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한 지 이년이 흘렀다.
나는 판교 IT 스타트업 회사에 취직해 컴퓨터 앞에서 엑셀 파일을 들여다보고, 무수한 점군으로 구성된 3D 스튜디오 내에서 객체를 찾고, 작업자들을 관리했다.
글을 쓰는 일에 지쳐 찾아온 직장에서 창작으로 인한 고통은 없었다. 다만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감각이 조금 더 생생해졌을 뿐이었다. 삶은 쾌적해졌고, 머리를 짓이기던 두통도 제법 괜찮아졌다. 지금까지 내가 해오던 일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서 있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때때로 갈증이 일었고, 시간이 지나갈수록 갈증이 두통을 대신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는 것 말고는 조금도 문제가 없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의식적으로 명랑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이 괴롭지만은 않았다. 아이는 내게 과분할 정도로 사랑스러웠고, 서너 살이 되고부터는 내 안의 온 우주를 동원해도 끌어올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순수한 형태의 사랑을 시시각각으로 증명했다. 때때로 미워서 견딜 수 없던 나 자신에게서는 만나지 못했던 사랑을 내 아이는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명랑한 나로 사는 것은 생각보다 행복한 일이었다.
하지만,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명랑한 나로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이야기.
고양이 식당(이하 어서 오세요, 고양이 식당입니다)을 쓰는 동안에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없었던 어두운 동굴을 들여다보는 일. 당사자도 아니면서 나는 왜 그때의 일들에서 떠날 수 없을까. 고양이 식당에서도 굳이 5월의 광주를 언급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잘은 모르겠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해도 괜찮을까. 여러 번 망설이고, 멈추고, 머뭇거렸다.
한 많은 푸른 섬, 시리도록 아름다워야 할 그 봄 4월에 시작된 아픈 사건들을 동화로 풀어낼 자격이 내게 있을까.
나는 제주에 살지 않고, 4.3 사건을 직접 겪은 사람도 아니다. 평생 육지에서 살았고, 이 참변에 대한 당사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동화를 쓰기에 앞서, 혹여 섣부른 펜 끝으로 유족들과 희생자분들께 상처를 주면 어쩌나 염려부터 일었다. 어쩌면, 비극을 소비해 이득을 보려는 마음에서 창작을 하려는 건 아닐까, 주검이 남긴 한 줌의 명예를 착취하려는 것은 아닌가. 참극은 언제나 사람을 매혹하고, 타인의 고통을 전시하는 일은 기묘한 카타르시스를 불러오니까. 나 자신을 의심하고 돌이켜보던 시간이 길었다.
아직도 단정해 말할 수는 없다. 내가 무엇을 알아 4.3에 대해 논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시도들은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미가 없더라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일이 모두에게 있지 않을까. 내게는 어느 4월의 제주가, 5월의 광주가, 7월의 대구와 10월의 여수가 그렇다.
동화와 웹소설, 에세이와 칼럼, 특별히 형태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를 써왔지만, 내가 쓴 글을 되새겨보면 주제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동일했다.
'사라지는 것들'
나 자신이 언제나 투명한 존재라는 감각으로 살아왔기 때문일까. 내가 만든 모든 이야기 속에는 '잊히지 말았으면 하는 것들'이 있었다.
들리지 않는 말들, 끝내 기록되지 못한 몸짓들, 누군가의 기억 속에만 남아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목소리들.
마음을 따라 걸어오다 보니 그것들을 활자로 남기고, 이야기로 쌓아놓고 싶어졌다.
"노래가 흐르는 바다"는 제주 4.3 사건과 그 속의 여성, 그 안에서도 해녀의 이야기를 다루는 동화가 될 것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소이', 해안가의 작은 마을에서 물질을 하는 아이가 내 머릿속의 제주를 걷고 있다.
8월에는 답사를 다녀왔다. 북촌과 곤을동, 표선의 한모살과 평화공원, 선흘을 걸었다. 자료를 모으고 계획을 짜고, 지도에 점을 찍고, 때로는 한 문장을 써보다가 지우는 내내 나는 48년의 어디쯤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혼자 걷기도 했고 누군가와 동행하기도 했다. 제주에서 도민들에게 직접 전해 들은 인터뷰들은 갈피를 못 잡던 기획에 큰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답사 기간 동안 만난 제주도민들의 이야기,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신 많은 분들의 격려가 지금도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다. 덕분에 시작할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을 완성할 수 있을지,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가봐야 끝인 줄을 알 것이다.
작업을 준비하는 과정을 기록하려 한다.
프로젝트의 모든 과정은 블로그와 브런치에 남길 예정이다.
부디 당신에게 닿기를 바란다.
나의 소이가, 제주의 소이가, 4월의 소이가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으면 한다.
「노래가 흐르는 바다」프로젝트는 제주 4.3 사건과 여성의 기억을 모티프로 한 창작 동화 작업입니다. 동화의 본편은 추후 공개 예정이며, 현재는 자료 조사와 여행, 인터뷰, 글쓰기 준비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당 작업은 2025년 경기문화재단 청년예술인 자립준비금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지원받은 시간과 자원이 헛되지 않도록 정직하게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