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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Aug 17. 2021

이 두렵고도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코로나 속 근황, 주절주절 의식의 흐름.


온갖 잡동사니로 뒤덮여 정작 찾아야 할 것은 보이지 않는 책상 서랍 속처럼 일에도 육아에도 글에도 집중이 안 되는데 그건 아마 안정감이 없기 때문일 거다.

코로나 시국 때문인지, 남편의 강의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고, 나는 예술인 창작지원금을 지원한 것과 여러 공모전에 응모하는 것 말고 별다른 경제 활동이 없다.

마케팅을 내가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매출이 떨어지면 마음이 조급 해지는 것은 내 쪽이다. 돈이나 글 걱정이 없을 때는 머릿속이 단순해져서 육아의 질도 높아지는데 온종일 어떤 카피를 쓰고 어떤 식으로 광고를 해야 매출이 높아질까, 어떤 셀링 포인트를 잡아야 소비자들의 이목을 끌 수 있을까, 이 달 카드값이 너무 많이 나왔네, 이 달에 마감하는 공모전이 몇 개였던가, 별 잡다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니 아이 앞에서도 멍하게 있을 때가 많다. 아이는 진정성 없는 엄마의 소통에 화가 나서 결국 비명을 지른다.  장편 시놉을 짜고 있었는데, 트리트먼트만 10페이지를 쓰고 잠시 멈춘 상태다. 본업보다 먹고사는 일이 중하다.


클래스 101에 에세이 강의를 개설하려고 준비 중인데, 준비과정이 복잡해서 헤매는 중이다.

z세대를 따라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

입시반, 등단반 강의 중압감이 크기 때문에 육아와 병행하기엔 적합하지 않아 취미 글쓰기 클래스를 열 계획인데, 과연 수요가 얼마나 될지는 미지수.


코로나가 심해지니 아이의 어린이집에는 등원시키는 인원이 별로 없다. 친했던 친구들이 많이들 가정보육으로 전환하니 아이는 전보다 원 생활이 지루한 듯하다.

친구들이 왜 많이 안 나올까,라고 물으니 자기가 보고 싶지 않아서 라고 대답한다. 깜짝 놀라 그게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못 오는 거야,라고 이야기했더니,

친구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렸다는 말로 알아들었는지 친구들이 오면 자기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리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말은 해줬는데 기분이 착잡하다.

4살짜리 아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병균과 세균, 손 씻기, 더러워, 만지지 마 같은 단어들을 지나치게 많이 알게 된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날 때 이런 세상을 꿈꾸진 않았는데, SF소설 속 디스토피아 같은 현실을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남편의 일이 원상복구가 되면 다시 장편을 쓸 예정이다. 메모만 쌓여간다.


나는 브런치에 한 번에 합격했다. 그래서 브런치 합격하는 법으로 강의를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생각해보면 나는 전공자이고 크든 적든 현직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니 글밥 먹은 값이라도 하려면 합격을 해야 맞는 것이겠지만, 본업이 있는 다른 이들에게 브런치는 또 다른 꿈의 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겠지. 요가 생기면 공급은 따라오는 것이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자유경쟁시대에 자신의 능력을 재화로 교환하는 기술은 참 중요한 힘이다.

부지런하기만 해서 되는 도 아니고, 이 날 자리를 보는 재능은 도통 내게서 발견되지 않을 뿐이고.


주제가 없으면 방치가 될 것 같아 요즘 관심이 있는 키워드로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기로 했다.

앞서 올라간 두 개의 글이 바로 그 키워드다.

10대에 HOT를 좋아했고, 20대에 G-Dragon의 팬이었다. 지금은 BTS. 무수히 많은 음악을 듣고 많은 가수들을 좋아했지만, 좋아하는 것과 팬이 된다는 것은 결이 다르다. 심지어 음악적 취향과도 완전히 결이 같지 않다. 팬이 된다는 건, 아침부터 저녁까지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바라보는 일과 비슷하다. 그 과정을 함께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는 일이다.


  내가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라는데, 나는 별 의식 없이 사람들에게 내가 누군가의 팬임을 밝힌다. 아이돌이 가요 산업의 상징이기 때문일까, '아이돌 팬'이라는 지위를 낮추어 보는 경향이 있다. 언더와 인디를 성스럽게 섬기는 것과 사뭇 대조된다, '나는 인디 음악을 좋아해요.'에서의 인디가 무엇인지 그 단어가 생기기 시작한 지 이십몇 년이 지난 지금도 잘 모르겠다. 심지어 소위 인디에서 열심히 노력해 메이저로 올라온 음악인들을 팽시키는 '인디팬'들도 보았다. 그들의 음악이 초심을 잃고 변했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였다. 좋은 음악이고 아니 고의 문제가 아니라 장르가 무엇인지 어떤 단어로 그 음악을 규정지을지가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다. 창작자보다 비평가가 말이 많듯 자칭 리스너들과 그들을 등에 업은 인디와 언더의 적통들이 언제나 작품보 말이 많은 법이다.

  궁금한 것은, 순수하게 언더 혹은 인디이고 싶어서 그것을 선택한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이다. 자신의 음악을 되도록이면 적게 들어주기를 바란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적은 사람이라도 들어주니 고맙다는 사람은 봤어도.

  이런저런 음악적 실험을 하다 보니 언더와 인디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지, 언더나 인디가 되고 싶어서 실험을 한 것이 아닌데 사람들은 종종 전후를 혼동하는 듯하다.

   나는 대중적인 글을 쓰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실험적이고 싶어서가 아니다. 내가 나를 드러내는 방식이 그렇게밖에 표출되지 않았을 뿐이고, 그것이 예술적이고 심미적이다라는 평가를 받은 것은 이후의 일이다. 보다 적은 이에게 읽혀 소수의 글이 되길 원해서 그렇게 쓴 것이 아니다. 그럴 거면 일기를 쓰면 된다.

  그래서 '나는 인디음악을 들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의 카테고리 역시 그들과 비슷하겠지만 그런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싫다. 단순히 편의를 위해 분류를 나누는 사람들과 그들의 말은 뉘앙스가 다르다. 이어지는 주장은 인디의 우월함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무언가를 배제해야만 자신의 취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예술대학을 다니면 신물이 나도록 볼 수 있다.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천재 예술가들을 신봉하며 그것 참 예술인의 길이라고 믿는 아둔한 인간들을. 대중이라는 단어에 진저리 치는 자칭 순수한 예술가들을.

 경제적 윤택함을 포기하고 자신의 실험에 생을 건 예술가들은 존경받아야 한다. 그들은 기존의 문법을 뒤집고 새로운 예술적 기반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누군가가 이루어 놓은 명예와 아우라만 훔쳐오려는 비겁한 이들은 경계해야 한다.

 나태함이나 열등감을 언더와 인디, 그리고 실험이라는 이름으로 덧입히는 이들을 절개 있는 예술가라고 칭송할 필요는 없다. 잘 구분하자. 정통, 적자, 적통 그런 단어들에 속지 말기를. 그것은 언더도그마에 빠진 사람들의 우스운 가면일 뿐이다. 나치도 부르짖지 않았나, 게르만의 적통만이 세상을 지배할 자격이 있다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소위 언더와 인디 음악인들이 부디 빨리 그 언더와 인디에서 벗어나 되도록이면 많은 돈을 벌고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음악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계에서 예술가들이 돈을 벌기 위해 움직이는 일을 그릇되다고 보지 않길 바란다. 문단에서는 원고료를 지불해 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었다. 예술을 하는 이가 돈을 탐해서는 안 된다는 편견 때문이었다. 현재는 문단의 세대교체 이루어지며 찾아보기 힘든 일이지만, 보라 얼마나 우스운가. 열정 페이라고나 불려야 할 부당한 대우가 예술가의 청렴함으로 치환되는 것이.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돈이 좋아서가 아니라 글을 쓰고 음악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울화가 많았나. 이렇게 길게 글을 쓸 생각이 아니었는데. 무명작가의 한탄으로 들어주길. 돈을 추구하지 않아야 순수한 예술이라는 편견이 예술가들의 목을 얼마나 옥죄는지 조금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꽃 피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즐운 일이고 그것이 아이돌이라는 이유로 폄하되지 않길 바란다. 깎아내리지 말고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예술을 하자.

 익명이니 속시원히 하는 얘기다. 직업 상 욕을 덜 먹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열을 올리면 다들 빠순이라서 그런다고 생각하니까. 왜지? 왜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다시 돌아가 올 해도 이렇게 코로나와 함께 한 해가 지나갈까 벌써부터 두렵다. 일상이 집에서 몇 백 미터 안으로 제한되어 있으니 시간의 흐름이 가늠되지 않는다. 파도가 일지 않는 바다에 떠 있는 기분이다. 삶은 치열한데 묘한 무기력이 공존해서 종종 불안감이 솟는다. 크게 삶의 방향이 뀌는 일이 많지 않으리라 여겼건만, 삶은 언제나 변칙적이고 불가해하다.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은 사람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다. 누군가 내 방에 노크를 하듯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가끔은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 내가 나를 인지하는 것 외에는 없는 것 같아서 외로울 때가 있다. 남편이 있고 자식이 있고 부모 있어도, 내 존재가 증명되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누군가 똑똑 문 두드려주는 소리기 위로가 된다. 나 여기 있다, 너 거기 있니. 그냥 그 정도의 확인.

 오늘도 그런 확인을 받고 싶은 날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두렵고도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다들 잘 살아가고 있는지.


다들 좋은 꿈을 꾸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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