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 Aug 20. 2021

영원이라는 말의 무게

팬질의 역사 <3>


어찌어찌 내가 H.O.T. 의 팬클럽에 가입할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 앨범 활동 때였다. 창 반항기에 접어들어 세상을 믿지 않는 척하고 다녔지만 돌아보면 순수하기 그지없던 시절이었다.


 특별히 해체라는 개념 없이 자연스럽게 개인 활동을 이어가다가 그룹 활동이 뜸해지며 잠정적 해체 수순을 밟는 요즘 그룹들과는 달리 그때는 해체면 해체, 그룹이면 그룹,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다. 

  H.O.T. 의 해체 이전에 젝스키스 해체가 있었다. 스키스는 체가 결정된 뒤  마지막 무대에서 '약속'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오열했다. 가끔 객석을 비추는 카메라 앵글에 눈물로 범벅이 된 팬들의 얼굴이 담겼다. 그 무대를 보며 나도 울었다. 영원이라는 약속의 무력함이 화면 너머로 선명하게 전해져서. 약속은 지켜지기 위한 일까 깨어지기 위한 것일까. 런 생각을 하면서도, 우리의 이별은 영원히 오지 않를 바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안 되는 것 같지만, 나는 H.O.T. 가 영원하리라 믿었다. 려서 세상 물정을 몰랐다. 유명세 뒤따르는 재화, 기회비용에 대한 생각, 멤버 개개인의 자아실현 같은 것에는 심이 없었으니까.

  마지막 콘서트에서 H.O.T. 의 리더였던 문희준이 직접 해체설을 일축다. 나는 희준 오빠의 팬이었다. 그래서 해체 소식이 발표되었을 때, 신감을 느꼈다. 오빠는 거짓말을 했어, 라는 유아원망과 함께 지푸라기 같이 붙들고 있던 청소년기의 환상이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H.O.T. 와 함께하는 세계 속에서 나는 현실을 조금 망각할 수 있었다. 이혼 직전의 엄마 아빠, 지독한 가난, 기를 써야 소외되지 않을 것 같은 학교생활, 망가져 가는 것 같은 내 세상.


  우리에 비하면 젝스키스의 이별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단숨에 퍼진 해체 관련 속보에서 오빠들은 영원을 속하던 빛나던 모습이 아닌 초췌한 얼굴로 작별을 고했다. 단순 해체가 아니라 언론과 소속사의 주장과 반박이 맞서며 여론전이 펼쳐지는 파국의 이별이었다. 금전적인 부분이나 멤버 간의 불화설 등 여러 가지 루머가 퍼졌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팬덤은 단숨에 찢어지고 소속사에 남은 2인은 배신자 낙인을, 소속사를 나간 3인은 소속사에서 퇴출된 낙오자 취급을 받았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해체 당시 오빠들의 나이가 20대 초반. 결정에 수반하는 모든 결과를 감당하기에는 어리디 어린 나이에 불과했다. 대형 기획사가 생긴 것도, 아이돌이라는 단어가 생긴 것도 처음이었다. 무언가를 보고 배울 수 있는 선례가 없었다. H.O.T. 의 마지막은 참 고단했다.


CD와 카세트 테이프에 담긴 마음의 기울기. 애증의 크기.

 

  문희준과 장우혁을 특별히 좋아했던 나에게 그 시기는  그 자체였다. 누구의 편을 들 수도 누구를 긍정할 수도 없던 마음, 지금도 내 오래된 서랍 속에는 문준 1집, 강타 1집, jtl1집이 공존한다.

  자리잡지 않았던 팬 문화와 소속사 간의 분쟁 사이에서 멤버들도 팬들도 크게 상처 받았고, 많은 팬들이 떠나갔다. 개개인 멤버들의 인기는 허상처럼 사그라들었다. 짧고 달콤한 꿈을 꾼 것 같았다.

   나는 멤버들의 개인 앨범이 나올 때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앨범을 샀다. 전과 같은 열정도 의미도 잃은 지 오래였다. 그저 지나간 내 순수함을 기념하듯 앨범을 사고 콘서트 DVD를 구매했다. 우리로 존재했던 나의 유년기와 H.O.T. 에 대한 긴 애도였다. 


  그즈음 내 삶도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엄마와 아빠는 이혼을 하고, 집안 가구에는 빨간색 차압 딱지가 붙었다. 열리지 않는 방문 속에서 엄마는 끊임없이 울었다. 설상가상 아빠는 교통사고 생사오가는 수술을 했다. 언니는 아빠의 병간호와 생계를 위해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는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무 생각도 없다는 듯이.


 우리는 함께 빛을 노래했는데, 남은 것은 깜깜한 어둠이었다.


  불행이었다. 그땐 그렇게 무너져가는 가정이 수두룩했으니까. 나의 꿈이 보통의 삶이 된 건 그때부터였을까.  H.O.T. 의 마지막과 함께 내 삶의 일부분도 막을 내리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이 두렵고도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