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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Sep 09. 2021

미친 세상에 눈 뜨고 살아가는 법

팬질의 역사 <4>




  H.O.T. 없이도 시간은 잘도 흘러가고, 나는 풍비박산 난 집 안에서도 멀쩡히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익숙하지 않은 불행도 금세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새로운 친구들과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려 애쓰는 동안 H.O.T. 는 어느덧 기억 속 저 먼 곳으로 밀려나 있었다. 어쨌든 나는 집안의 불행을 이겨내고 살아남아야 했고,  이미 갈라선 H.O.T. 는 내 삶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되새겨보면 꽤 오랫동안  문희준을 좋아했다. 군대 위문공연까지 다녀올 정도였으니 장수 팬이었다고 해도 될까. 내가 그를 오랫동안 지켰던 이유가 오로지 음악 때문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그렇지는 않다. 는 락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콘, 레드 제플린, 린킨파크, 에반에센스,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이름들이겠지만 당시 내게는 낯선 뮤지션들이었다.


   문희준은 음악을 시작했다. 나는 을 공부했다. 위에 열거한 밴드들의 음악을 연도별로 줄 세워 듣고 해석하고 공부하며 입문기를 거쳤다. 어디 가서 유명한 록 음악이 들리면 제목쯤은 읊을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음악을 즐기지 못하고 공부해야 했던 이유가 뭘까. 답은 하나뿐이었다. 싸우기 위해서.


  80년대 생, 그리고 90년 초에 태어난 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그 시절 문희준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졌었는지.

그를 향해 쏟아지던 집단적 광기 포화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어느 날 '문희준, 오이만 먹고 락을 했다'는 기사가 났다. 다이어트 중 오이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한 것 때문이었다.  날은 기자가 락 자격증이 있으따고 싶지 않냐고 질적인 유도 질문을 했다. 몇 차례 회피하다 마지못해 버무린 것을 '문희준 안티들 때문에 힘들어, 락 자격증 따고 싶어요!'로 기사가 다. 기자들을 먹잇감을 찾듯이 문희준을 따라다녔다.


 인터넷 커뮤니티가 크게 확장되던 시기였다. 온갖 밈들이 넘쳐났다. 공중파 방송에서 그를 비하하는 단어가 유행어처럼 쓰였다. 개그맨들은 방송에서 문희준을 흉내 내며 광대을 했고 당시 인터넷 방송을 하던 김구라는 문희준을 향해 입에 담지 못할 음담패설내뱉었다. '문희준 비하'는 일상으로 번졌다. 일종의 사회현상처럼 보일 정도였다. 세상은  화가 나 있었고 미친 대중들에게는 물고 뜯을 고깃덩이가 필요했다.


 실력논란 혹은 자격검증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것은 집단적 폭력의 현장이었다.


  나는 그때 압제를 경험했다. 소수자가 되는 간접적 을 했다. 대중에게완전히 고립되었. 지독하고 거대한 규모의 따돌림을 당했다.  어디에서도 문희준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반 농담 식의 '일반인 코스프레'가 아니었다. 문희준을 좋아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루저'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 취급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런 취급을 당하는 것과 실제로 그런 것의 차이는 습자지 한 장이다. 때로는 그 습자지 한 장의 차이가 군가의 입을 틀어막는다. 문희준을 술자리의 안주거리로 삼으며 낄낄거리는 무리들의 조롱을 듣고도 침묵한 적이 훨씬 많았다. 언론과 대중과 네티즌과 리스너들이 앞을 다투어 문희준과 팬들을 바보로 만들고 저잣거리의 조롱거리로 삼았다. 모두가 힘을 합하니 그것은 권력이 되었다. 


 우리는 문희준을 지키기 위해 을 공부했다. 몰랐던 음악을 듣고 샘플들을 분석하고 표절이라는 곡들의 기타 리프들을 수집했다. 그가 출연하는 공연장에는 박수가 아니라 야유가 가득했고, 문희준은 그 속에서 노래를 했다. 그러는 동안 문희준이 죽지 않기를, 오빠가 부디 까맣게 뒤덮인 저 지독한 세상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우리들을 바라봐주기를 기도했다.


 진풍경은 또 하나 있었다. 바로 공연장에서 잘못된 오보와 루머를 바로잡기 위해 안티들에게 팸플릿을 제작하고 부채를 만들어 나누어주었던 우리들이다. 타 가수와 함께 공연하는 곳이면 어디든 팸플릿과 부채를 가져가 나누어주었다.  속에는 악질적인 루머들과 정정된 보도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안티들을 위한 굿즈. 걸 보며 그들은 우리를 또 조롱했다. 우리는 매 공연장마다 끝까지 남아 팸플릿과 부채를 줍고 쓰레기를 치웠다. 그렇게라도 하면 그가 욕을 덜 먹을까 해서.


 바보 취급받는 것은 상관없었다.  수 없는 미움으로 가득 찬 이상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 단 한 명이라도 이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준다면, 이 이상하고 잔혹한 꿈속에서 깨어나 준다면 고마울 것 같았. 누군가 한 명은 죽어야 끝날 것 같은 지독한 안갯속에서 고개를 들고 눈을 떠 주기를, 매일 아침 문희준이라는 이름을 검색하며 안 좋은 소식을 만날까 봐 두려움에 떠는 일을 멈출 수 있기를, 미움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누군가 박살 내버리기를 간절히 바랐. 


 래, 희준의 음악적 역량이 족했을 수 있다.  음악에 그가 어울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취향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초보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럴 수 있다. 구나 그런 생각을 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음악을 하기 위해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 하거나, 특정 음악을 좋아는 것을 누군가에게만은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에게는 그런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를 욕하던 사람 중 그의 음악을 제대로 들어본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는 그게 가끔 궁금했다.


 그렇게 록 음악에 먹칠을 한다던 그가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대를 간다는 기사가 나자 모든 분위기가 역전이 되었다. 그간 안티들을 고소하지 않았던 문희준은 '문보살'로 불리기 시작했고,  많던 티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문희준은 H.O.T. 활동 당시 무리한 스케줄과 안무 등으로 인해 이미 척추 전반이 고장 난 상태였다. 신체검사 결과로는 현역 입대가 불가능했고 안티들은 그에게 병역비리혐의까지 씌워 미리 욕을 해댔다.


 군 면제의 정당한 사유가 있었음에도 그는 재활 후 신검을 받아 현역으로 군대에 입대했다. 문희준의 군면제 소식이 들리면 신나게 조리돌림을 할 준비를 하고 있던 안티들은 현역으로 입대하는 문희준의 모습에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문희준은 자신을 좋게 봐줘서 감사하다고 말을 했지만, 전혀 고맙지 않았던 나는 당시 자리잡지 않았던 사이버 범죄에 관련된 법령과 쓰레기 같은 안티들에게 엿이나 먹으라고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정말 음악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문희준이 락을 하든 힙합을 하든 삼바를 추든 동요를 부르든. 입맛에 맞게 두들겨 팰 누군가가 필요했을 이다.


  그래서 나 역시 락을 하든 힙합을 하든 삼바를 추든, 그의 곁을 끝까지 지키고 싶었다. 세상이 그에게 안전한 곳이 될 때까지 방공호가 되어 지켜내고 싶었다. 그가 제대하고 여론이 바뀌어도 불안쉽게 가시지 않았다. 순식간에 뒤집힌 만큼 다시 쉽게 등 돌려 버릴 것 같았다. 랫동안 기쁨이 아니라 불안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에게도 팬들에게도 물 위에 뜬 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위태위태한 나날들이었다. 그렇게 서서히 여론에서 그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한 편으로는 다행스러웠다.


  시간이 흐르고 나 역시 부지런히 일상을 살다 그의 결혼 소식을 접하고 딸을 낳은 모습을 보고서야 마음속에 있던 개가 걷히는 것 같았다. 그에게 지켜야 할 소중한 존재가 생겼다는 것, 그를 지켜줄 소중한 존재가 생겼다는 것, 우리가 아닌 누군가가 그의 방공호가 되어 줄 것이라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들마다 의견이 다를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결혼 소식으로 마지막 불안 날려 보낼 수 있었다. 이제는 마음 편히 행복하기만을 바랄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아프고 힘든 날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속에서 함께 버티고 지켜온 지난날들이 그에게 힘들고 괴로웠던 기억만은 아니었기를, 그의 무사 무탈을 빌며 끝없이 흔들던 우리의 작은 불꽃도 기억해주기를 가슴 깊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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