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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Sep 21. 2021

나의 세계를 지탱해준 소년이여

팬질의 역사 <5>

밤은 깊었는데 잠은 안 오고
늘어난 두통과 싸우고
이리저리 뒤척이다 생각에 잠겨
또 펜을 붙잡고 빼곡히 써 내려가는 가사

시간이 흘러가면서 외로움만 커져갔어
멋모르는 의무감 내겐 가장 큰 부담였어
오르막 길이라면 내리막 길도 있는 법
도망치기엔 너무 늦어버렸어, I wanna go
          
 G-DRAGON 1집 「소년이여」 中



   는 14년 차 권지용의 팬이다. 제와 누구를 손절하고 부정할 생각도 없지만, 나는 14년 전부터 지금까지 빅뱅이 아닌 권지용의 팬이었다. 지드래곤과 권지용. 현실과 무대를 넘나드는 에너지 넘치고 아름다운 그 소년을 동경했다. 가 소중하게 여겼기에 빅뱅을 응원했고, 그의 피 땀 눈물이 서려있었기에 뱅을 응원했다.



   20대 초반, 창문 없는 고시원에서 3년을 살았다. 다리를 쭉 펴면 발끝과 머리끝이 벽과 벽에 닿는 아주 작은 방이었다. 그마저 저렴한 곳을 찾느라 몇 번이나 옮겨 다녀 그 시절의 주소지는 일 년에도 여러 번 바뀌곤 했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공무원 준비를 하던 때였다. 게다가 내 아버지는 20년 가까이 군대에서 근속한 군무원이었다. IMF 시절을 거치며 공무원이라는 직장에 신뢰를 넘어 신념을 품게 된 아버지는 우리 자매를 모두 고시원으로 보내버렸다. 원하던 대학에 합했지만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여자 직업으로 공무원만 한 게 없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행정법이나 행정학은 전혀 내 적성과 맞지 않았다. 적성에 안 맞는 일을 묵묵히 실행해낼 만큼 우직하지도 못했다.


  배경은 그랬다. 그 시절의 나는 모든 것을 버릴 만큼 독립적이지도 않았고 아버지의 말에 고분고분 따를 만큼 순종적이지도 못했다. 스스로를 비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살아가던 날들이었다. 해서 나는 나를 증오했다. 원망의 대상으로 삼기에 나만큼 만만한 존재가 없었으니까.


    현실 속의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동경한 것은  처음이었다. H.O.T. 의 팬이었지만 그 애정에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판타지가 너무 많이 개입해있었다.  나는 기획사가 제공하고 내가 정한 틀 안에서만 그들을 사랑했다. 몇 년 전 '나 혼자 산다'에 나온 장우혁의 모습을 보며 매우 놀랐다. 내가 알고 있던 이미지와 달리 그는 매우 섬세하고 감성적이었다. 나는 현실의 H.O.T. 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나는 나의 환상을 사랑했 것이다. 처음이라는 게 다 그렇듯 누군가를 동경하는 일도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는 등록금 대신이라며 매달 고시원비를 내주었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그 시절의 유일한 꿈이었는데 아버지의 돈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나를 끄럽게 했다. 왜 나는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 걸까. 내 삶이 굴러가는 방향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사는 길 말고는 이 떠오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기생한 채 연명하는 무가치한 인생 같았다. 이룰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없.


  세상은 바야흐로 2세대 아이돌의 전성기였다. 동방신기와 SS501의 팬덤이 시장을 견인하고  이름 모를 그룹들이 산발적으로 생겨나고 사라졌다. 신기하게도 팬덤은 기획사를 따라가는 경향이 있었다. 음악과 외모, 창법까지, 같은 기획사에서는 유사한 스타일의 그룹들이 탄생한다. 그래서 H.O.T. 의 팬들은 동방신기의 팬으로, 젝스키스의 팬들은 SS501의 팬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H.O.T. 이후로 SM 아이돌을 좋아해 본 적이 없다. 가 동경했던 것은 H.O.T. 가 가지고 있던 시대정신이었다. 10대를 대변한다는 취지 아래 사회비판적인 노래를 부르던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동경했다. 하지만 그 역시 사실은 H.O.T. 의 것이기보다는 유영진의 이덴티티에 가까웠다.


   언니와 나는 아버지 몰래 아르바이트를 해서 원룸 보증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손재주가 있고 글쓰기를 좋아하던 나는 아르바이트와 문구류 샘플 작업과 인터넷 소설 연재를 병행하며 돈을 모았다. 작은 회사에서 계약직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함께 일하던 친구가 빅뱅의 팬이었다. 그룹 이름이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아이돌을 좋아하는 친구를 내심 한심하게 여겼다. 계약직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코 앞의 살 길도 불투명한 마당에 연예인을 좋아하는 친구가 한가로워 보다.


    "난 그런 세계에서 졸업했어. 환상을 팔아 돈을 버는 세계에 낭비할 시간 따윈 없어."


   렇게 생각했다. 사는 게 바빠서 누군가에게 나눠줄 애정이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절 나의 삶은 밑 빠진 독처럼 그저 소진하는 것뿐이었다. 채워지는 것은 없고 빠져나가는 것만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긴 연애도 짧은 연애도, 결핍에서 비롯된 연애는 소모적으로 끝을 맺었다. 점점 더 염세적으로 변해갔다. 사랑은 왜 상처가 되는 걸까. 가족에서 비롯된 나의 결핍은 채지지 않은 채 혈관 속을 떠돌았다.


   러던 어느 날 빅뱅 다큐를 보았다. 것을 왜 보게 되었는지 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꾸준히 빅뱅 이야기를 하던 친구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


  다큐인지 모큐인지 모를 그 영상 속에서 단 한 명에게 눈길이 갔다. 8년 동안 연습생을 했다는 마르고 독기 어린 눈의 소년.  려한 외모는 아니지만 웃는 얼굴이 무척 매력적인 소년. 나이에 어울리는 해맑은 미소보다는 긴장되고 예민한 얼굴을 훨씬 더 많이 보여주었던 18세의 권지용, 지드래곤.


지드래곤 1st 솔로콘서트 making book 中에서


   8년이라는 불안한 연습생 시절을 견뎌내던 그의 모습에 동질감을 느끼기는 어렵지 않았다. 나 역시 안개에 휩싸인 미래를 향해 안대를 쓰고 걸어가는 심정으로 매일을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다큐에서 그의 모습을 '사포지용'이라고 말하며 까칠하다는 식의 농담을 하곤 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가혹한 사람이었다. 버들에게 보이는 이성적이고 냉정한 태도는 신을 향한 인색함의 1/10도 되지 않았다.  그 모습이 한편으로는 안쓰러웠고 한편으로는 위안 되었다.


   상황에 변명하지 않으려면 나를 다그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지도 알았다. 나는 이미 스스로에 대한 채찍질에 잠식당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에 잠겨있었다. 가 내 삶에서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출처 본인,


  그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멘토처럼 나를 끌어올렸다. 자신을 다그치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는 그의 모습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래서 나는 무대 위의 지드래곤보다 먼저 권지용의 팬이 되었다. 내 삶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듯 그가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꿈을 지켜나가기를 바라게 되었다. 대 위의 폭발적인 에너지, 압도적인 카리스마, 그런 페르소나보다 그 아래 있는 권지용을 더 아꼈다.


 14년 전 처음 그의 팬이 되었던 순간에도 14년이 흐른 지금도, 나에게는 지드래곤보다 권지용이 우선순위다.


지드래곤 1st 솔로콘서트 making book 中에서


   수많은 변명으로 내 삶을 부정하 싶었던 순간 그는 가 외면하던 진실을 직면하게 해 주었다. 어쨌든 이 삶은 내 것이라는 사실, 의 인생을 빌려 살듯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실, 루어지지 않더라도 꿈을 꿨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실, 내게는 꿈꿀 권리가 있다는 사실. 

   여태껏 누구도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첫 생활기록부에 적혀 있던 '작가'라는 장래희망이 학기가 지날수록 부모님의 장래희망으로 동기화되는 동안 내 삶에서 나는 점점 자취를 감추었다. 내 꿈은 나와 상관없이 '교사'가 되고 '공무원' 되었다.

  래서 나는,  살아지는 대로 사는 이 삶인 줄 알았다.


   는 늘 데뷔조 그룹의 선두에 서있었다. 자신이 제대로 리드하지 못하면 그룹 전체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 되는 대신 전체의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 노력했다. 메라가 돌아가는 동안에도 그의 쓴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멤버 모두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오해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연습 기간에 비례해 현저한 실력차가 재했다. 허허실실 웃으며 사람 좋은 리더가 되는 대신 그는 객관적이고 냉철한 선봉장 되기를 선택했다. 사서 욕받이가 될 필요가 있을까. 사람들이 건방지다고 입방아를 찧을 때 나는 그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다. 누가 봐도 기민하고 영리한 소년이었다. 카메라에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모를 리 없었다. 어차피 그의 데뷔는 거의 확정된 상태였다. 이미지를 챙기며 너그럽게 행동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게 그의 방식이었다. 필요한 행동을 했다. 자신에 대해 해명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타인이 자신을 평가절하하거나 오해해도 대응하지 않고 묵묵히 감수했다. 는 음악으로 말했다. 가사 속에서만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가 얼마나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인지, 그의 내면에 어떤 갈등이 자리하고 있는지 가사를 보면 그의 현재가 읽혔다.


   악역을 자처한 탓에 그는 팬덤 내에서도 타 멤버의 팬들에게 미움을 샀다.  방송이 나갈 때마다 쏟아지던 악플에 개의치 않고, 그는 매번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무대에서 실수하면 안 되잖아요."

  슬쩍 웃는 미소 아래 간혹 쓸쓸함이 엿보일 때가 있었다. 그게 권지용이라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연습생 시절의 영상들을 모두 찾아보았다. 커다란 후드 모자를 쓰고 그 위에 캡 모자를 또 덮어쓴 채 고개도 들지 않고 비트박스를 연습하는 어린 소년. 작은 연습실에서 땀에 절은 채 악이 서린 눈으로 춤을 추는 습. 그룹에서 낙오할지도 모르는 하위권 멤버들을 다그치, 하지만 그 누구보다 꼼꼼히 멤버들의 영상을 모니터 하는 소년의 모습이 담긴 영상들을.


   가와 상관없어지는 순간의 그는 그제야 제 나이를 찾은 것처럼 해맑은 웃음을 짓곤 했다. 이렇게 치열하게 부딪치고 깨지면서도 그가 닿으려는 은 어디일까. 그곳이 궁금해졌다. 어디건 함께 가보고 싶어졌다. 그를 바라보면 내 삶을 떠나지 않는 의문들도 조금은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나의 두 번째 동경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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