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준 신드롬에 대하여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이 높은 사람

by 김 연남


영화 왕과 사는 남자 개봉 이후,

장항준 감독을 향한 관심은 단순한 흥행 이상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왓챠피디아 인물 랭킹 상위권에 오르고, 과거 인터뷰와 예능 출연 영상이 재조명되고 있다.

온라인에서는 그의 말투와 태도, 배우자와의 관계까지 다시 소비된다.

말하자면 일종의 ‘장항준 신드롬’이다.

스크린샷 2026-02-24 오후 6.11.46.png 2026년 2월 24일 기준 왓챠피디아 인물 랭킹


흥미로운 점은, 이 관심이 영화적 성취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장항준 감독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그의 모든 작품을 챙겨본 팬도 아니다. 다만 그의 태도와 가치관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묘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김은희 남편’이라는 수식어로 불렸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이 배우자에 의해 수식되는 일은 흔치 않다. 대개는 불편해하거나, 억지로 선을 긋거나, 어떻게든 자신의 권위를 복구하려는 태도가 먼저 나온다. 그런데 그는 그 호칭을 농담처럼 받아들였다.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말들이 계산된 겸손처럼 보이지 않았다. 위협을 느끼지 않는 사람의 태도였다.


나는 이 지점이 지금 시대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 전혀 다른 유형의 남성상이 온라인을 뒤덮은 적이 있다.

나는 그 단어를 좋아하지 않지만, 한번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른바 '알파 메일' 이론.


알파 메일(Alpha male)이란 남성들 사이에서 인지되는 사회 계층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용어로, 본래 동물 동물행동학의 개념에서 유래했다.


100여 년 전

허버트 스펜서가 주창한 사회진화론이 부활한듯한 이 이론이

2020년 대들어 20-30 남성 위주로 다시 추앙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알파메일'로 대표적인 인물은

영국출신의 전 킥복싱 선수인 '앤드류 테이트'.

그는 부와 권력, 여성에 대한 통제, 공격적인 성공 담론을 앞세워 젊은 남성층의 열광을 얻었다.

특히 일부 남성 커뮤니티에서는 그를 “남성성의 회복”을 상징하는 인물로 소비했다.

경제적 불안, 연애의 좌절, 사회적 경쟁 속에서 자존감이 흔들리는 청년들에게 그는 단순하고 명확한 메시지를 던졌다.

image.png 2023년, 앤드류 테이트의 저서 '강력한 남자의 삶' 온라인상에서 꽤나 큰 지지를 얻고 있다.

“남자가 다시 위에 서야 한다.”


그의 콘텐츠는 과시적 부, 스포츠카, 순종적인 여성, 위계가 분명한 관계를 반복적으로 제시했다.

겉으로는 강해 보인다.

하지만 그 구조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상한 점이 보인다.

그가 말하는 ‘강한 남자’는 늘 누군가를 아래에 두고 있어야 한다.
여성은 순종적이어야 하고, 관계는 통제 가능해야 하며, 성공은 과시되어야 한다.

이 모델은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실은 매우 불안정하다.
왜냐하면 타인을 눌러야만 유지되는 힘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자존감이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자존심은 외부에 의해 쉽게 상처받는다.
그래서 더 크게 말하고, 더 세게 주장하고, 더 강한 이미지를 요구한다.
자존심은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반면 자존감은 내부에서 안정된다.
굳이 외부를 눌러서 확인받지 않아도 된다.
타인, 여성, 배우자의 성취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온라인상에서는 여성에게 잘해주는 남성을 “스윗하다”고 조롱하기 시작했다.

이는 2025년 현재는 이른바 '영포티'라는 용어와 결합하여,

영포티는 스윗하다, 라는 일종의 조롱 섞인 문구를 만들어 냈다.

집안일을 분담하고, 감정을 표현하고, 연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남자들.
그들은 이들을 마치 남성성을 거세당한 존재처럼 묘사했다.


그런데 이 조롱의 구조 역시 단순하다.
관계를 협력으로 이해하는 남성을, 권력 게임에서 밀려난 존재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큰 착각이 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그들이 추구하는 대로

평생을

엄마와 와이프로 이어지는 '여성 가사 노동'의 위에서 영위하는 삶이 목표라 한다면,

그야말로 홀로 설 수 없는 존재,

'영원한 마마보이'가 아닌가?


자신이 돌봄을 받아야만 유지되는 삶을 이상화하면서
그것을 ‘남자다움’이라고 포장한다면,
그건 강함이 아니라 유아기로 돌아가고자 하는 반동이자,

과거 모델에 대한 집착에 가깝다.

지금은 1920년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지위는 이미 크게 재편되었다.
경제적 역할과 교육 수준, 문화적 영향력에서
위계는 예전만큼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과거의 지배 모델을 고집하는 태도는
현실을 인정하기 싫은 자존심의 발현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왜 테이트는 여전히 소비되는가.


나는 그것이 불안의 반작용이라고 본다.

여성의 사회진출로 인해 경쟁은 치열해졌고,
연애와 결혼은 점점 어려워졌으며,
전통적 역할 모델은 해체되었다.

이때 누군가가 “남자가 다시 위에 서야 한다”라고 말해주면
그 단순함은 일종의 위안이 된다.
복잡한 현실 대신 명확한 위계를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함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지배는 관계를 오래 유지시키지 못한다.

결국 오래 살아남는 모델은
타인을 억누르는 모델이 아니라
함께 설계할 수 있는 모델이다.


나는 그래서 장항준이라는 인물이 흥미롭다.

그는 과시하지 않고, 자신의 배우자가 더 유명하다는 사실을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배우자의 꿈을 응원하고, 지원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는 웃음의 소재가 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웃기지만, 우습지 않다.


나는 이것이 지금 시대의 ‘진짜 알파메일’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알파메일의 정의는 바뀌고 있다.

누군가를 누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을 스스로 운영할 수 있는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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