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예산을 세우며 생각해 본 사업과 연애의 유사성. 그리고 열무국수..
내가 몸담고 있는 사업은 1년 단위로 지자체와 협약을 맺고, 연 수억 원 규모로 지속해 나간다.
우리 쪽의 전략은 명확하다.
지자체의 니즈를 세밀하게 파악해,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결국 그들이 우리와 독점적인 계약을 할 수밖에 없는 '조례'를 제정하도록 유도하는 것.
그렇게 되면 우리 사업은 필수재처럼 자리 잡아 그들이 발을 빼기 어려워진다. 그렇기에 우리와 사업을 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입증하고 끊임없이 설득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본다.
어디까지나 이 사업은 ‘지원’ 사업이라, '행정보조'의 성격을 버릴 수 없기에 각 부서에서 맡고 있는 수많은 업무 중 우선순위가 다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있으면 좋은 것’, 하지만 ‘없어도 그럭저럭 지낼 만한 것’의 위치. 이 사실을 바꾸긴 어렵다.
이건 마치 현대 사회에서의 결혼의 위치와 닮아있는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않더라도, 취미, 일, 운동, 가족, 친구 등 다양한 것들이 현대인의 삶을 구성하고 있다. 흥미를 느낄만한 것들 다수가 주변에 깔려있다 보니, 연애와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었다. 연애를 시작하면 솔로 때보다 그에 준하는 책임(상대에게 헌신하는 등)이 따르기에, '웬만큼 상대가 좋지 않으면' 하지 않는 추세이다.
나이가 지긋하게 차서 '이쯤엔 가야 하지 않을까..' 하고 슬슬 조급해지는 때가 아닌 이상, (개인의 성향에 따라서 이것도 무의미하겠지만..) 굳이 연애결혼을 하지 않는 사회가 된 것 같다
게다가 언제든 사랑이란 건 변할 수 있는 것이다 보니, 그 가변적 속성에 대해 일찌감치 깨달은 사람은 '평생 살 반려자를 구한다' 는 데에 미련을 버렸고(프랑스인들이 대체로 그런 듯하다)
아직 어느 정도 낭만이 있는 사람들은 '정말 이 사람, 놓치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이 드는 상대와만 평생가약을 맺고 싶어 한다.
그런데 어디 그런 사람 찾기가 쉬운가? 본인이 즐기고 있는 콘텐츠를 뛰어넘을 만큼 좋아하는 상대를 만나야 연애가 시작될까 말까 한데, 그러한 사람을 내 바운더리 내에서 만나는 것도 어렵지만, 만났다 한들 상대와 내가 마음이 같을 거란 가능성도 상당히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하고 싶은 현대인'들은 내가 원하는 상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하겠다.
상대 입장에서 딱히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의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받아왔는데, 그 상대가 갑자기 비용지불을 원한다면(내가 상대와의 연애나 결혼을 원한다면), 당연히 소비자입장에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대가 해당서비스(기 세워주기, 칭찬하기, 시비 걸지 않기 등..)에 꽤나 만족했고, 당장 내년부터 해당 서비스가 종료된다면 아쉬운 입장이라면 판매자가 어떤 요구를 하든 들어줄 수밖에 없다.
마치 엘리트 직원의 연봉협상을 거부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러니 내 목소리가 당당하고 내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내가 과연 소비자(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만한 서비스를 제공했는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하겠다.
그 답이 Yes라면 당당하게 관계정립(앞으론 유료서비스입니다. 내년부턴 예산 태워서 협약 맺읍시다 고갱님^^)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며,
그 답이 No라 하더라도 '나의 서비스'에 자신이 있다면, 나를 필요로 할 좋은 수요처가 많을 것이라, 갑자기 상대 곁을 떠나더라도 내 입장에선 크게 아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산이 아주 많은 어떤 지자체와의 시범사업이 잘 안 되어 내년도 예산을 태우지 못하게 됐다 해도, 아쉽지만 어쩌겠나.
내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가치가 높다면, 세상엔 날 찾는 다른 소비자들이 많기에 연연할 필요가 없어진다.
보다 많은 돈과 시간을 할애해 줄 수 있는 소비처가 세상에 많다는 것을 안다면, 무상으로 해당 서비스를 이용하려는 양심 없는 소비자의 곁을 망설임 없이 떠날 수 있다.
일단 떠나기 앞서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더 많이 인내하고 철저히 상대 입장에서 생각을 하며 상대가 바라는 것을 주기'가 되었다면, 그다음 스텝으로 '소비자에게 당당하게 내가 원하는 바를 요구(관계정립 혹은 협약요청)'를 할 줄 알아야 한단 것.
이건 판매자의 몫인 것 같다.
소비자 입장에선 만족하고 쓰던 무료서비스를 굳이 돈을 내고 쓸 이유가 없다. 그러니 먼저 "협약을 하자, 관계정립하자"라고 이야기할 이유가 없다.
시범사업을 유지하던 판매자가 먼저 소비자의 의중을 물어봐야, 상대가 나와 생각이 같은지 다른지 신속히 파악할 수 있고, 그다음 빠르게 관계를 정리하고 다른 사람(다른 수요자)을 찾아 떠날 수 있다. 그러니 원하는 게 있다면 '요구는 판매자가 하는 게 맞다'는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지만 내가 정말 잘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연애-결혼이나, 내가 몸담고 있는 사업이나 '지원' 성격이 강한 서비스이기에, 늘 판매자 쪽(관계에 있어선 상대를 더 원하는 쪽)이 더 아쉬운 쪽이 되기가 쉽다. '있으면 좋긴 한데, 없어도 뭐..' 성격이 강한 사업이기에,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기가 늘 어려운 문제다.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한, 상대방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물어보기가 어렵단 이유로,
'내년도부터 예산 태우지 않으면, 해당 서비스가 종료될 것입니다.'라고 정확하게 언질을 주지 않고 갑작스레 사업을 종료시켜 버린단 건, 여러모로 아쉬운 대응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수요자는 내가 제공했던 서비스에 꽤나 만족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추가 예산을 세워서라도 사업을 지속할 용의가 있었을 수도 있다.
판매자 입장에서 그런 생각을 묻기 어려운 이유는, 내가 제공한 서비스에 대해 상대가 만족했는지 아닌지를 들춰보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내년부턴 예산을 투입해서 협약을 맺고 사업을 진행해 보자 제안했을 때, '거절당할 공포'가 올라오기 때문.
그리고 여자에게 있어서 그 거절당할 공포는 상상을 초월한다...
* 마치 나에게 있어서 계장님께 내년도 사업을 지속하시겠냐고 물어보는 메시지가 너무나 어렵게 느껴졌던 것처럼. 마치 애써 무시하던 지난 나의 성적표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아쉬운 건 판매자이므로, '협약 맺을 의지가 있음'을 표명하고, 다음 협약 여부를 물어보는 건 무조건 내 쪽이어야 한다.
사랑을 하기가 어려운 사회.
연애는 단지 인생을 좀 더 재밌게 만들어주고 행복감을 주는 여가수단의 하나일 뿐, 이것을 대체할 거리들은 얼마든지 많은 현세태에서 언젠간 연애-결혼을 하고 싶은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적의 포지션이 뭘까를 생각해 보자면 이러한 것 같다.
1. 상대를 관찰하고 수요/니즈를 발굴한다.
2. 그에 대해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최고의 퍼포먼스라 함은, 소비자의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3. 상대가 내가 주는 서비스에 익숙해지고 의지하게 만든다. 즉, 삶에 스며든다.
(나를 잃으면 늘 들이마시던 공기가 없어진 것 같은 기분.. 그 정도는 못 되어도 나의 존재가 사라졌을 때, 최소 생활이 무료하고 불편감, 그리움과 다시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느껴질 정도는 되어야 하겠다.)
회사 선배들은 이 사업에 '조례가 지정'되면 이러한 우리 사업의 불안한 포지션도 좀 더 안정을 잡아갈 수 있을 거라 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평생가약을 맺은 결혼도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파트너의 선택에 따라 언제든 관계는 깨질 수 있다.
둘 사이에 아이가 있대도 그 아이를 본인이 오롯이 책임지고서라도 날 떠나겠다는 상대를 어떻게 붙잡아 세울 것인지? 그깟 조례, 결혼 서약은 언제든 뒤집을 수 있다.
'이 사업을 필수적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조례가 만들어졌다 해도, 갑자기 정부의 예산이 줄어, 가장 우선순위가 높은 데에 예산을 우선배치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그렇다면 갑작스레 기존에 제정됐던 조례를 변경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사업을 필수적으로 이용하게끔, 조례로 제정했다고 해도, 그것에만 의지하긴 어렵다.
모든 건 영원할 순 없다.
그러니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수요자 맞춤형 서비스'가 아닐까..
상대의 니즈를 파악하고 적절하게 대응해 주어, 내년에도 찾고, 그다음 해에도 찾고 싶은 서비스를 주는 '사업'이자 '사람'이 되고자 끊임 없이 노력하는 것.
그것이 어느 하나 확실하게 정해진 것 없는 이 세상에서, 나라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최적의 포지션이지 않을까.
이것이 한 사업에 대해 내년도 당초예산을 세우며 느끼는 바이자, 앞으로 내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름대로 정리한 바다.
Bexco 국제주류박람회의 수많은 시식 부스를 돌아보고 왔어도, 맛이 계속 기억에 남아 최종적으로 다시 찾게 되는 그런 comfort food 같은 사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