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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K 사극(史劇)은 왜곡 판타지물

세상을 여는 잡학

요즘 중국 웹 드라마를 원작으로 삼아 제작한 모 방송사 퓨전 사극의 인기가 상종 가를 치고 있다. 현대에 살던 젊은 남자가 타임슬립 현상에 의해 근 이백 년 전 조선 시대에, 그것도 철종 부인인 중전의 몸으로 궁궐에 나타나 온갖 해프닝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이 사극에는 이런저런 구설이 따르고 있다. 크고 작은 왜곡 장면들이 자주 드러나기에 말들이 많은 것이다. 대략 훑어보면 이런 것들이 눈에 띈다. 일상 상황임에도 중전이 큰 의식 때나 쓰는 머리 장식인 어여머리에 떠구지 얹은 큰머리를 하고 궁궐 내를 활개 치고 돌아다닌다든가, 정전 안 어좌에 임금과 중전이 같이 앉아 있다든가, 중전 신분으로 수라간을 마구 드나든다든가 등등. 수라간 장면에는 그나마 상궁이 아닌 숙수가 요리사로 근무하고 있다는 묘사는 사실과 같기에 천하를 우롱한 사극 <대장금>에 비해 그나마 기특하다 하겠지만. 이것 말고도 도를 넘은 왜곡 오류 설정들이 수두룩하다. 그중 유독 눈에 거슬리는 것 두 가지 정도를 꼽고 일단 환관 관모(官帽)부터 보자.     

월탄 박종화가 1936년 3월부터 12월까지 매일신보에 연재한 역사소설 『금삼(錦衫)의 피』가 있다. 그것을 가지고 1961년 신상옥 감독이 <연산군>(1962년 1월 개봉) 제목으로 영화를 찍었다. 한창 촬영에 임하던 신 감독이 뭔가 께름칙한 것을 느끼고는 이렇게 말했다. “출연진들이 같은 관복에 같은 관모를 입고 쓰고 있으니 뒤에서 보면 누가 병조판서이고 누가 환관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하며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했고, 이에 옆에서 그 말 들은 배 아무개 촬영감독이 나서더니 환관역 배우들을 불러 일렬횡대로 세웠다. 그리고는 그들 뒤로 돌아가서 배우들이 쓰고 있던 관모의 좌우 모시(帽翅. 깃)들을 쪽쪽 뽑아버렸다. “자, 어떻습니까? 확실히 구분되죠?” 모시 빠진 관모를 쓴 환관의 모습. ‘뭣이’ 빠진 자들인지라 이미지가 딱 맞아떨어질뿐더러 외양 구분도 잘 되기에 신 감독은 쾌재를 올리며 촬영에 돌입했다. 그리하여 당대 거장에 의한 희대의 환관 관모가 탄생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니 그때부터 영화든 TV든 각종 사극에서 환관은 반드시 모시 빠진 관모를 착용하는 것으로 공식화되어 오늘에 이르는 것이다. 당시 이 영화에는 여배우 출신 의상 디자이너 이 아무개가 의상 감독으로 참여하고 있었으나 임금역 맡은 김동원 배우에게 중국 천자나 입었을 황색 용포를 입히고, 원래는 아홉 줄이어야 맞을 것을 스물 몇 줄이나 되는 면류관을 떡 하니 씌우는 등의 웃지 못할 장면이 수두룩했다. 고증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을 때의 일이다.      


엘리자베스 키스 작 '조선의 환관'

                                              

엘리자베스 키스라는 스코틀랜드 여류화가가 황혼기의 조선 땅에 들어와 많은 작품을 그렸다. 일제 강점기 당시 경성에서 전시를 자주 했다고도 한다. 그가 그린 환관 초상화가 있다. 경복궁에서 북악산을 배경으로 나이 든 어느 환관을 모델 삼아 그린 그림으로 그림 속 환관이 쓴 관모에 모시가 좌우로 붙어있다.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한 직후 덕수궁에서 젊은 세자(순종)와 어린 세손(영친왕)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이들 뒤로 수염 없는 환관들이 서 있고 그들 관모에도 분명히 모시가 붙어있음을 알 수 있다.


고종과 영친왕 뒤의 환관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환관 신분으로는 파격적으로 공신 지위를 받은 환관들이 무려 스물네 명이나 있었다. 그중 울진 임씨 가문 출신 환관으로 진주대첩에서 곽재우와 함께 혁혁한 무공까지 세웠던 임우라는 사람이 자신의 초상화를 전하고 있다. 관복에 구름 사이로 백한(白雗. 흰 꿩) 그림 새겨진 흉배가 있으면 문관 3품에 해당한다고 하니 환관으로 크게 출세한 분이다. 이분의 관모에도 깃이 당당히 붙어있다. 환관은 궁내 행정직 관리로 전문직 종사자들이었고 그로써 엄연히 지체 높은 관리였다. 따라서 일반 문무백관들의 관모와 마찬가지로 모시 붙은 관모를 썼던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뒤 후손들에 의해 또 무엇인가를 ‘뽑힘’에 분명코 묫자리 뒤숭숭할 것이다.     

환관 관모에 이어 그다음, 그것도 재주일 것이 하지 말아야 할 짓만 어쩌면 그리 잘도 골고루 섞어 행했는지, 보면서 아연실색할 모습들이 대거 포착되던 궁중 잔치 장면. 바쁘게 헤아려 보다가 왼 눈 오른 눈이 서로 자리를 바꿀 정도로 가관이었다.

임금이 정전 안에 고정되어 있어야 할 어좌를 정전 밖에, 그것도 월대 위도 아닌 월대 아래 정전 뜰에 차려놓고 백관들과 함께 면복 차림으로 음식을 취하는 모습. 정전 뜰 어도(御道)를 덮은 고작 농구장 코트 정도 넓이의 낮기만 한 단(壇)에 대비가 백관들과 같이 앉아 음식을 먹는 모습. 그나마 대략 3품급 관리들은 그 단에 앉아 있으나 하급 관리들은 그 낮은 단에조차 오르지 못한 채 돌바닥에 돗자리 깔고 앉아 음식상을 받게 하고 있다.

‘조선왕조 궁중 모습’을 관광 상품으로 세워보자는 취지로 궁중 의식이나 잔치를 재연해 보이는 문화 사업이 1995년경부터 시작되었을 때는 아무렴 초기이다 보니 예산 부족과 고증 미흡으로 미숙한 장면들이 속출하곤 했었다. 그런 장면들이 2010년대 초반 정도까지 끈질기게 이어지더니 이제는 괜찮아지나 했으나 웬걸, 아무리 제작 편의상 그랬다 해도 과하게 지나친, 초기보다 더 해괴망측한 장면이 바로 이 사극에서 시연되고 있었다.             


경복궁 근정전 상월대에 설차(設次)한 어좌. 사진 최정철


임금은 궁중 잔치 때 정무복인 곤룡포에 익선관, 격을 갖춘 잔치에는 강사포에 원유관을 착용할 것인데도, 종묘제례나 사직대제와 같은 엄중한 대례(大禮) 때 착용하는 면복과 면류관 차림을 갖추고 있는 철종을 보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의상을 담당하였는지 그 용기가 가상할 뿐이다.

또, 조선 시대 때는 임금이 어좌를 정전 밖에 내놓고 앉은 적은 한 번도 없다. 회의든 잔치든 임금은 늘 정전 안 붙박이 어좌에 앉았다. 잔치 경우에는 삼정승 급 정도가 정전 안에 들어가 임금과 대작 겸 합석했고 나머지는 거의 사람 키 높이에 육박하는 정전 월대 상단에 맞추어 정전 앞뜰을 덮은 보계(補階. 임시무대)에 앉아 음식을 먹었다. 그 보계 가운데 공간에서 악사들이 연주하고 무동들이 춤추었으며 보계 위로는 현대 기술로도 재연해내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대형 차양이 높다랗게 펼쳐있었고.

공간과 시설 재연도 전혀 맞지 않는 것이야 예산 문제려니 치자. 임금보다 상급인 대비가 높은 자리도 아닌 정전 뜰 바닥 백관 옆에 같이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다는 것은 또 어떤 설정이란 말인가? 이건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극치의 왜곡 장면이다. 그뿐 아니다. 세상 어느 나라의 고위 공무원들이 돌바닥에 돗자리 깔고 앉아 음식을 먹는단 말인가? 우리 조상님들은 아무리 없이 살아도 음식만큼은 땅바닥에 앉아 먹지 않았다. 거지들이나 땅바닥에서 음식을 먹었지.

K 드라마에 심취해 있는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한국인의 조상들은 아무리 고관대작이 되어도 땅바닥에 앉아 음식을 먹었다는 이미지를 한 방에 확산시키는, 장(杖) 백 대 내려치고 천 리 유배 보낼 작태가 마음껏 행해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내용 외에도 심한 오류들이 여전히 웬만한 사극에서 숱하게 횡행 되고 있다. 자랑스러운 한국 전통문화의 한쪽을 일부 PD와 작가, 의상 소품 스태프들이 망치고 있음에 볼 때마다 소태 씹는 맛이다. 제작비가 아니라 해당 분야 창작자들의 개인적 철학 부재가 큰 문제다.   

  

20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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