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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조선의 왕들은 왕 즉위식을 하지 않았다

세상을 여는 잡학

한국인들처럼 왕을 좋아하는 민족은 전 세계적으로 드물 것이다. 왕조가 망한 지 백 년도 더 지났건만 왕조의 상징인 왕은 여전히 살아있다. 한국인의 왕 사랑에는 유사 이래 아래로만 내려다보았던 후진국 일본에 의해 5백 년 역사의 조선이 허망하게 무너졌음에 대한 분통함과 애잔함, 그리고 유교 문화의 잔존 현상이 개입되고 있는 것 아닐까 싶다. 어떤 이유든 간에 한국인의 왕 사랑 현상은 오늘날 영화든 TV든 왕이 등장하는 사극들을 흥행 면에서 짭짤한 성공을 거두게 하고 있음이요, 왕이 등장하는 서울의 궁중문화축전 같은 행사나 다른 지역들의 왕 관련 축제들에서도 대체 불가 존재로 등장하고 있음은 부동의 사실이다.      

충남 서산의 역사유적지인 해미읍성에서는 해마다 해미읍성 축제를 열면서 태종 어가 행차 재연 프로그램을 십 년 넘게 시행하고 있다. 이방원이 세자도 아닌 왕자 시절, 수하들과 함께 지방 행차 다녀오던 길에 왜구가 자주 노략질해 온다는 해미 쪽을 멀리서 바라보며 ‘저곳에 군대를 배치해야겠군.’ 작심하고는 훗날 왕이 되어 충청 병마절도사를 해미읍성에 부임시켰다. 그 전설을 근거 삼아 당시 축제를 주관하던 서산문화원장의 고집으로 태종 어가 행차 재연 프로그램이 십 년 가까이 행해진 것이다. 왕자 시절 잠시 스쳐 지나갔다는 그 단초 하나 맹렬히 입에 물고 기어이 해미읍성에 왕을 현신시킨 문화원장의 노익장에 두 손 들 정도다. 몇몇 온천이 있는 지역도 마찬가지다. 피부병 앓던 어느 왕이 왔다 갔다는 것을 브랜드 삼아 온천축제를 하면서 왕 행차를 반드시 보여준다. 하려면 제대로 격식이나 갖춰서 할 것이지, 여전히 가장무도회 행진 수준이니 안 하느니만 못하다.

1995년 경복궁 근정전에서 ‘궁중문화재현행사’ 첫 사업이 치러질 때 왕은 근정전 밖 월대 위에 가설한 어좌에 앉았다. “의식의 주인공은 의식 진행 그 자체이지 왕이 아니다, 또 왕을 정전 밖에 앉히는 것은 왜곡이다.”라는 행사 연출자의 의견이 있었으나 당시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공무원들은 왕을 전면에 내세우도록 고집을 부려 끝내 그 형태로 행사가 치러진 것이다. 근정전 안의 어좌에 앉아 있어야 할 왕이 밖으로 나와 앉은 이 왜곡 현상은 그 후 확고한 전례가 되어 각종 TV 영화 사극에 의식이나 잔치 장면 때 왕은 무조건 정전 밖 월대의 어좌에 앉아야 했다.     

고증과 실제 여부를 떠나 조선왕조문화재연과 관련하여 우리가 잘 모르는 부분이 제법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것 한 가지를 말해보겠다. 요즘은 잘 볼 수 없으나 예전 사극들을 보면 왕으로 즉위한 조선 시대 왕들은 어김없이 화려한 왕 즉위식을 거행하곤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조선 시대의 왕들은 제대로 된 왕 즉위식이 한 번도 시행되지 않았다. 고종이 황제로 즉위할 때 즉위식을 하지 않았느냐고 할 수 있겠다. 고종은 분명히 원구단 가서 천제 지낸 후 덕수궁으로 환궁, 면복 입고 황제들만 쓰는 열두 줄 면류관 쓰고 멋들어지게 황제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고종이 황제가 된 나라는 조선이 아니라 대한제국이었다. 그러니 조선왕조 기간에는 제대로 된 왕 즉위식은 없었다는 것에 고종의 황제즉위식은 끼어들 바 아니다. 물론 세자 이도가 부왕 태종으로부터 선위(禪位. 부왕 생전에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는 것) 받았을 때, 원래는 가장 중요한 의식인 대례 때 착복하는 면복과 아홉 줄 면류관을 배제하고는 그보다 하급인 강사포와 원유관 차림으로 아주 간략하게 치른 것이 그나마 어느 정도 외양을 갖춘 유일한 왕 즉위식이었다. 그 외 다른 왕들은 모두 사위(嗣位. 부왕이 죽고 나서 상중에 왕위를 승계하는 것)로 왕을 물려받았기에 상중 슬픔에 화려한 왕 즉위식은 일체 배제했다. 한마디로 조선의 왕 즉위식은 하례(賀禮)가 아니라 상례(喪禮)였다. 또, 광해군이나 연산군처럼 현재의 왕을 쫓아낸 후에도 신왕 즉위식은 거행하지 않았다. 민심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각종 사극에서는 화려한 왕 즉위식이 보란 듯이 묘사되어왔다.     

드라마적 영화적 상상이라 쳐도 문제 되는 것은 또 있다. 열의 열, 어느 왕 즉위식 장면을 봐도 다음과 같은 수순에 따른다. 먼저 왕과 왕비가 정전 뜰에 있는 어도(御道. 왕만 걷는 길)를 걸어 정전 앞에 이른 후 계단을 타고 정전 상월대에 올라간다. 그리고는 정전 밖 상월대에 놓인 어좌에 왕 왕비가 동석하고는 문무백관들의 하례를 받는다. 하나하나 완벽한 왜곡이다.

일단 어도는 그저 왕실과 궁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 공간이기에 왕도 특별한 때가 아닌 이상 그 길을 올라타지 않았다. 또 평소에 신하들이나 궁중 관원들이 쓸데없이 그 어도를 올라타서 으쓱대기라도 했다가 걸리면 삼족의 목숨이 왔다 갔다 했다.

그렇다면 궁중 의식이 있을 때 왕의 입퇴장 동선은 어떻게 될까? 정전에서의 의식 준비가 마쳐지고 삼엄(三嚴)을 알리는 대북 울림이 있으면 정전 뒤 거처나 집무실에 있던 왕은 여(轝. 지붕 없는 가마)를 타고 정전 동쪽에 도착한다. 여에서 하차한 왕, 이제 그곳 동편 계단을 타고 올라 정전 동문을 통해 정전으로 들어가 정전 안의 어좌에 앉는다. 의식이 끝나면 왕은 이제 어좌에서 내려와 정전 서문으로 나가 서쪽 계단을 타고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던 여(동계에서 왕을 내린 후 서계로 이동)를 타고 정전 뒤쪽으로 퇴장한다. 이것은 공식적인 큰 의식 정도 때에 취하는 동선이고, 일상적인 정무 때문에 정전을 입퇴장 할 때는 어좌 뒤 일월오악도에 설치된 출입문을 통하여 즉, 정전 후문을 통해 간단하게 들락날락했다. 

정리하자면 왕은 좌우후방에만 들락날락한 것이고 정전 전방 공간에는 여간하여서는 몸을 내비치지 않는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하지도 않았던 왕 즉위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해, 웬만하여서는 걷지 않는 어도를 걸핏하면 걷게 해, 내놓지도 않았던 정전 밖 어좌에 앉아······. 그런 식으로 왕 즉위식을 묘사하는 것을 보면 한숨만 나올 뿐이다.      

조선왕조 왕 즉위식의 실체는 다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 병상에 누운 부왕이 도승지와 삼정승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寶. 국새를 담아 둔 나무함)를 세자에게 건네주는 것, 그러고 나서는 도승지가 정전 뜰 문밖에 허위(虛位. 가짜 자리)를 차려놓고 종친 문무백관을 불러서 신왕 이름으로 작성된 즉위 교서를 낭독하는 것, 그리고 새로 왕에 지명되어 왕이 된 신왕이 정전에 입장하면 종친 문무백관들이 조용한 음성으로 천세산호(千歲山呼) 하례를 올리는 것, 그러면 신왕은 슬피 우는 것,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다. 이렇듯이 조선 시대의 화려한 왕 즉위식은 일절 없었으니 혹 사극 중 왕 즉위식 장면이 있다면 그 허황한 왜곡에 혀를 찰 일이지 절대 감탄할 일 아니다.     

몇 년 전, ‘고종황제즉위 120년’을 기념하여 황제즉위식 재연 행사가 서울시 주최로 치러진 적이 있었다. 일제의 조선 침탈 전략상 얼떨결에 떠밀려 황제가 되더니 끝내 망국의 황제가 된 그 괴상하기만 한 역사 상황에 무슨 의미와 시의성이 있다고 우격다짐으로 재연을 했는지 자다가도 일어나 웃다 지칠 일이었다. 당시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필자는, “왜 이런 행사를 하는가? 정 하겠다면 황제 후손들이 현재의 대한민국에 어떤 식으로 공복(公僕)할 것인가에 대한 시의에 맞는 행사로 성격을 갖추길 바란다.”라는 의견을 냈지만, 그저 성균관 유림 노인들 근 백 명 모여 놓고는 황제 만만세나 외치다 끝난, 허망하기 짝이 없고 시대착오적이기만 한 쓸쓸한 고종황제즉위식 재연행사였다. 조선 왕실 관련하여 서울시나 문화재청, 대한황실문화원과 이씨종약원 등은 이제는 엄중한 현실을 직시하고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는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202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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